시인의 초상. / 성봉수
책을 펼치면 작가의 약력란에 사진은 언제나 멋스러웠다. 더군다나, 그 주인공이 여성일 때는 더욱 그랬다. 그녀들은 흡사 천경자 화백의 모델이었나 싶을 정도로 커다란 꽃이 달린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거나 긴 생머리칼을 하고 있었다. 시선은 늘 갸웃하게 틀어진 고개로 허공을 향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멍청했다. 엄연히 약력란에 쓰인 그녀들의 지난 흔적들을 손으로 꼽아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지만 나는 눈에 보이는 그 흑백 사진을 그녀들의 모습이라고 착각했다. 아니,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믿었다.
요즘이야, 원하는 정보를 어디에서건 손쉽게 접할 수 있다 보니 그런 오해가 덜하긴 하지만, 아무튼 그때의 나는 알에서 처음 깨어나와 각인시킨 어미의 모습처럼 그녀들의 모습을 믿고 있었다. 그러다가, 출판 기념회나 문학 행사에라도 참석하게 되면, 그 기억 속의 이미지와 합치되는 얼굴을 찾으려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정작 내 앞에 손을 내민 그녀들은 짙은 분칠 안에 주름을 감추고 있는 아줌마가 되어 있었다. 행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아줌마가 되어 있는 그녀들의 책장을 다시 한 번 넘겨보았다.
초록을 기다리는 설렘이었던 나뭇잎이 있었다면 다시 읽는 시구에서는 바람에 온몸을 다 내어주고 빈 몸으로 흔들리는 낙엽으로 바뀌어 읽히고는 했다.
난, 마음 한편이 쓸쓸해지면서 그녀들이 지난 시절의 사진을 약력에 올린 마음을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았다. 그리고 허상을 잡고선 내 교만감을 창피스러워했다.
내가 시인이란 이름을 얻게 되고 벌써 20년이란 시간이 한 일 없이 흘렀다. 이쯤 되면 중견이란 상투가 얹혀질 세월이다. 그때 오돌개처럼 검은 머리칼의 20대 청년은 반백의 중년으로 변해버렸다. 초롱거리던 눈망울은 간데없고, 이젠 돋보기라도 맞추어야 할 형편이다. 문단의 상황도 나만큼이나 변해서 원고를 청탁해 와도 원고지 접수를 사양하는 곳이 대부분이다. 쓰다가 남은 원고지가 누렇게 퇴색되어 책장 안에서 잠을 잔다. 온라인이란 문명의 혜택 안으로 자리를 잡은 시인들은 이젠 당당하게 자신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전설 같던 상상 속의 괴짜 기인들은 더는 없고 시시콜콜하고 친절한 설명들로 옆집 아저씨 아줌마가 되는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시인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시를 쓰는 사람으로 산다. 진짜와 가짜가 범벅이다. 나 또한 온라인의 소통이란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한번 읽고 버리는 가짜 시를 쓰기도 한다.
세월이 너무 많은 것을 버리게 했다. 처음 그때나 지금이나, 내 사는 형편은 달라진 것이 없고 시인으로 살고자 했던 지난 시간은 현실과 이상의 언저리에 서 있는 쓸모없는 괴목이 되어 버렸다. 난 지금도 그때의 그녀들처럼 20년도 훨씬 지난 사진을 내 초상으로 쓰고 있다. 가장 아름다웠거나, 가장 아팠던 시절을 기억하기 위함이라는 것. 이제야 알 것도 같다.
내가 온라인에서 소통을 핑계로 거짓 시를 끼적거리면서도 버리지 않은 단 한 가지.
가장 아름다웠고 가장 아팠던 지난 기억의 초상이다.
20101103
Eric_Carmen-All_By_My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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