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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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 끽연

컵.

by 바람 그리기 2017. 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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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하다 보니 점심 설거지가 그대롭니다.

뒤집어 놓은 고무장갑에 바람을 넣어 돌리면서,

남아 있던 물이 튀는 것을 피하려 고개를 어슷하게 돌렸습니다.

그 시선이 닿은 찬장.

그 찬장 안 두 번째 칸 맨 앞줄.

그곳에 놓여 있는 컵.

 

그렇지 않아도 커피가 생각나던 중이었는데, 콩을 갈기가 귀찮고 믹스는 떨어지고…. 먹을까? 말까? 망설이던 중이었습니다.

컵을 꺼내 뜨거운 물을 담아 놓고,

바깥채로 건너가 커피를 내렸습니다.

 

무척 더운 날이었습니다.

종일의 노동에 땀 범벅이었던 몸을 씻지도 못하고 두어 시간을 길 위에서 보냈나 봅니다. 그러니, 땀띠가 온몸에 돋고 그것도 모자라 발진처럼 심하게 독이 올랐습니다. 그것이 누구에겐가 각인 된, 오류 단절로 끝을 맺는 연극의 마지막 장이었을 듯싶습니다.

한동안 나는 이 컵 안에 여러 가지 것들을 담았었습니다.

장맛비 쏟아지는 늦은 밤의 사케를 담고

그 도시의 평상 위에 놓였던 캔맥주를 담고

공중전화 뒤편 으슥한 골목의 뜨거운 입맞춤을 담고

얼굴을 담고

오해를 담고

궁금증을 담고

그리움을 담고

그렇게 혼자만의 밤과 정적의 시간을 담았습니다.

그것들은 가끔 시가 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은 끊길 수 없는 시간의 괘도에 밀려 잊히거나, 눕혀진 풀잎처럼 기억 저편으로 희미해졌습니다.

 

지금에 닿은 모든 지난 것들이,

단 한 순간 단 한 매듭인들 간절하지 않았던 것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결국, 지금이라는 명확한 실체 앞에 그 모든 앞선 것을 짊어지며 함께 하기엔,

삶의 시간이 담긴 망태의 그물코가 너무 넓지 싶습니다. 그래서, 냇가의 물이 수초와 여울에 자연 정화되어 시간을 잇는 것처럼,

코에 걸릴 수 없는 소소한 시간을 덜어내고 살아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찬장에 넣어 뒀던 컵을 꺼내 두 손으로 감싸 안고 차를 마십니다.

떠난 시간을 손잡을 수 있는 실체가 있다는 것이, 기억의 회기를 아름답게 합니다.

다시 꺼내 망각을 불려 마시는 그 언제까지,

나는 또 큰 코의 시간 망태를 지고 그때의 지금을 걷고 있을 겁니다.

 

전영의 '어디쯤 가고 있을까'를 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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