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
본문 바로가기
낙서/ㅁ사랑방

손님.

by 바람 그리기 2023. 4. 3.
반응형

 


 무슨 세미나였는지 확실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문학단체 주관의 그 세미나에 그이가 참가했다. 나도 그이도 서로가 오래전 알았던 그때의 그 사람인 걸 한눈에 알아봤지만, 행사에 참여한 공적인 대화 이외에 서로에 대한 어떤 사담도 나누지 않았다. 그저 사람과 사람으로 패널과 패널의 입장에 충실해 각자의 의견을 내고 반론도 제기하며 다른 참석자들과 다를 것 없이 시간을 보냈다.
 행사가 끝나고 식사를 겸한 술자리를 위해 예약된 장소로 자리를 옮기는데, 어둑해진 거리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들쭉날쭉하긴 했지만, 그 기세가 금방 멎을 것 같지 않고 양도 바짓단에 젖을 정도로 웬만하다. 갑자기 심란해진 날씨에, 우르르 몰려가던 일행 끝을 천천히 따라오던 그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저... 죄송하지만, 저는 아무래도 먼저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아이고, 선생님! 먼 곳에서 일부러 오셨는데 식사도 안 하시고 이렇게 가시면 어떡합니까? 하루 주무시고 내일 근교 구경도 하시고 천천히 가시지요. 오시기도 쉽지 않으신 길인데..." 일행 중 누군가가 정색하며 말했다. 그 말에 그이가 힘 없이 시르죽은 목소리로 나지막이 대답한다.
 "아, 예... 날씨도 그렇고... 아무래도 지금 가는 게 나을 듯싶네요"
 뒤편에서 아무 말 없이 그 상황을 바라보고 있는 나를, 그이가 대화 도중 한차례 슬쩍 훔쳐봤는데 모른 척 눈길을 피했다.
 "정 그러시면, 식당 예약 시간도 있고 날씨도 그러니... 성 시인께서 대표로 역까지 모셔다드리면 좋겠는데..." 행사 좌장이 두리번거리며 나를 찾는다.
 좌장에게 눈을 맞추며 대답 대신 가볍게 고개를 꾸벅이는데, 그이가 내게 보내는 시선이 뜨겁게 느껴진다. 내가 그렇게 고개를 조아리는 동시에 일행 중 누군가 말한다.
 "거, 예약 시간이야 좀 늦으면 어떻습니까! 이렇게 먼 길 오셨는데 그냥 가시는 건 예의가 아니고, 먼 거리도 아니니 모두 함께 역까지라도 배웅하시죠!"

 우리 일행은 플랫폼이 멀리 보이는 역사 밖 출찰구 근처에 서서 그이가 떠나기를 기다렸다. 기차가 도착하고 그이는 가벼운 묵례와 함께 손을 흔들며 기차에 올랐고 우리는 돌아서 식당으로 향했다.  비나리는 광장을 반쯤 가로질렀을 때 전화벨이 울린다. 모르는 번호다. 하지만 그이의 전화라고 직감할 수 있었다.
 받을까? 말까? 잠시 주저하는 동안, "제대로 인사도 못 나눴으니... 기차 안에 앉아 이렇게 전화 넣은 것도 큰 결심이었을 텐데..." 몇 가지 애증의 감정이 호르륵 스쳐 갔다.
 '녜, 성봉숩니다'
 "저 예요..."
 '...'
 "저 지금 역 뒤편에 있어요. 기차에서 다시 내렸어요"
 '...'
 "지금 만날 수 있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 돌아갈 수 없었어요.."
 일행중 한 명에게, 집에 급한 일이 생겨 잠시 다녀와야겠다고 거짓말을 하고 가던 길을 돌려 다시 역사 쪽으로 향했다.
 바람에 우산이 홀딱 뒤집혔다.

 종종걸음으로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틈에 서서 한동안 서로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이가 먼저 배시시 웃으며 말을 건넨다.
 "나 많이 늙었죠?"
 '아니, 여전한데 뭘...'
 "도저히 이대로 모른 척 그냥 갈 수 없었어요. 우리가 무슨 큰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서로 모른 척할 정도로 나쁜 감정이 있던 것도 아니고..."
 '...'
 대답대신 눈을 마주치며 빙긋 웃는 내게, 막혔던 말문이라도 터진 것처럼 연이어 조급하게 내뱉는다.
 "오늘, 같이 있으려고요"
 '그게 무슨 말여?'
 "같이 이런저런 얘기 좀 나누고 싶다고요!"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막 차까지 끽해야 두어 시간 남았을 텐데... 차라리 날 좋은 날 다시 만나서...' 내 대답이 채 끝나기 전 그이의 손사래 치는 것 같은 목소리가 들린다.
 "오늘 집에 안 간다고요. 외박한다고요! 같이 있고 싶다고요!"

 내가 그 후 어쨌는지 물론 알 길이 없다.
 그이를 토닥여 막차로 돌려보냈을 수도 있고, 막차가 도착하는 시간까지 그이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이의 말대로 밤을 함께 보냈을 수도 있다.
 그 알 수 없는 여러 가정 중에서도 또렷한 한 가지는 '내가 왜 그이를 의식적으로 한사코 외면했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그이에게 죄지은 것도 없으면서 왜 내가 그이의 주홍 리본이라 여기며 외면해야 했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오늘 집에 안 간다고요. 외박한다고요! 같이 있고 싶다고요!"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심장은 터질 것처럼 방망이질 치고 있었으면서 말이다.

 

★~詩와 音樂~★ [시집 『너의 끈』] 잠에서 깨어 / 성봉수

잠에서 깨어 / 성봉수 엉망으로 꼬인 실타래들이 죽음 같은 잠으로 포박해 갔다 신호가 끊긴 단파장의 금속성이 그물을 찢고 의식을 건져 올렸다 환영 같은 어둠의 그림자를 쏟아내는 브라운관

sbs150127.tistory.com



 지난 밤의 어정쩡한 관계의 복기와 모닝 담배를 먹으며 읊조린다.
 '무슨 일이 있나...'

 

 
 2023031금
 Ray Parker Jr-One Side Love Affair

 

반응형

'낙서 > ㅁ사랑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똑같아요.  (0) 2023.04.16
잘 살아 있습니다.  (1) 2023.04.09
바람결에 마주 서는 일은,  (0) 2023.03.28
시간이 그럽디다.  (0) 2023.03.25
노을이 진다고 슬퍼 마시게  (0) 2023.03.18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