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그럽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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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ㅁ사랑방

시간이 그럽디다.

by 바람 그리기 2023.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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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거노인 연명하는 뒷방이라도 좋고,
 백면서생 신선놀음하는 사랑채라도 좋고,
 얼치기 땡중님 도 닦는 법당이라고 해도 좋을 이곳.
 이곳에 걸린 모든 달력은 또 다른 달력 위에 겹쳐 있습니다.
 겹친 달력은 어머님 모시고 병원에 입원하던 그해 그달에 멈춰져 있습니다.

 어느 것 하나도 기억에서 지우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니 모르겠습니다. 저 깊은 곳에서는 그러하겠지만, 꼭 그래서만은 아니고 그냥 그렇게 내버려 두고 여섯 번째의 새 달력을 겹쳐 걸었습니다.
 달력 앞에 섰다가 오늘은 갑자기 서울 큰 이모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때 외할아버님 기일에 친정 나들이하셨다가, 환우 중이셨던 언니 안부를 확인할 겸 집에 들르셨습니다. 어머님과 셋이 마주 앉은 자리에서 제게 말씀하셨죠.
 "아니 조카! 들어오며 보니 집에 아버지 문패가 걸려 있네?"
 '예. 없애기 서운하기도 하고, 어머님 존함도 함께 있어서요...'
 "아이고, 그러는 거 아녀! 형부 돌아가신 지가 몇 해인데 아직도 문패를 걸어두면 어떡해! 이승에서 붙잡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저승에 옳게 못 가는 거야. 그래서 때 놓치면 구천 떠도는 귀신이 되는 거고. 조카, 지금 당장 나가서 떼!"

 내가 지금 잡고 있는 것이 무언지 생각합니다.
 어쩌면 그리움을 내세운 집착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래. 그래도 상관없는 일인데, 그러면 왜 이렇게 집착할까? 생각했습니다.
 <지고지순한 일생의 희생>의 크기가, 그 힘이 아직도 나를 지켜주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또 생각했습니다.
 '과연 이 집착이 긍정의 힘으로 작동될 수 있을 거며, 나 스스로 그 집착을 버거워하지 않고 배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

 집착이 달력뿐이겠습니까?
 돌아가신 어머님께서 서 계시던 그 부엌에서 어머님께서 쓰시던 물건으로 음식을 만들어 산 내 목구멍으로 넘기고 있는데요, 내가 매달려 있는 그것들이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조리가 망가졌고요,

가위 손잡이가 부러졌고요,

그예 국자 모가지도 부러졌습니다.

 시간이 가며 그렇게 하나둘 나와의 연을 끊어내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여자와 남자 손의 효용이 다른 탓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기억하고자 하는 나의 집착을 아랑곳하지 않고 시간이 이렇게 하나둘 내게서 떠나고 있습니다.
 생각했습니다.
 '손 놓아야 할 때는 온다'
 '아무리 내 기억의 의지로 울을 쌓고 막아서도, 시간의 풍화를 버텨 낼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집착으로 치부하고 손 놓고자 하는 이 집착에 애써 집착하지 말자'

 작정하고 새 물건을 사 와 헌 물건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린 날,
 선영에서 꺾어 온 진달래 봉우리가 환하게 벌고 있습니다.

 

 슬픈 내 삶을 따뜻하게 해준 참 고마운 사람입니다


202303242920금
이승철-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장날.
'먹어 본 게 언제인지... 궈 먹으면 맛있겠다...'
갈치 좌판 앞에 서서 고민하다 그냥 왔습니다.
약 타러 들린 약국.
약사님이 내 대가리를 보고 외마디 탄성을 질렀습니다.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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