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문학단체의 봄나들이 겸 문학기행에 다녀왔습니다.
한양 나들이하면, 열에 열은 지하철을 이동 수단으로 선택하다 보니, 굴 밖의 세상을 온전하게 본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시끄럽던 헌재 앞도, 광화문 거리에도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으니 지난 몇 개월이 꿈이었나 싶고...

탑골 공원 앞을 지나치며 신호 대기 중인 창 밖.
늘어선 작은 탁주집을 보면서,
"저기서 먹으면 참 맛나겠다. 언제 한번 올라와서 들려야겠다"생각했습니다.
구불구불 대사관로 고개를 지나 길상사에 도착했습니다.


일주문은 요정 대원각시절 길상화 보살께서 세웠던 대문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군요.
해설사와 약속한 시간보다 30분 남짓 일찍 도착한 덕분에 혼자 한 바퀴 둘러보고, 해설을 들으며 또 한 바퀴 둘러봤습니다.


극락전 본전을 마주 보고 우측에 자리한 범종입니다.
원래는 본전 좌측에 자리한 것인데 시주인 김길상화께서 "요정(대원각) 아가씨들이 옷 갈아입던 팔각정에 세우고 싶다"는 바람이 있어 현재의 자리로 옮겨 다시 세웠답니다.

종각 대들보 상량문에 법정 스님의 친필이 남겨져 있습니다.

종각 옆으로 요정당시 대연회장으로 쓰였던 건물은 현재 설법전으로 법회 장소로 쓰이고 있고요.
설법전이 끝나는 모퉁이를 돌아서면 "길상 보탑"이라 부르는 단아한 석탑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탑은 크리스천인 영안 모자 백성학 회장남께서 기증하셨다는군요.
본전 뒤편 좌측 끝에 자리한 법정스님 입적 장소인 진영각 가는 길에, 이 절을 시주한 대원각 사장 길상화(김영한) 보살님의 공덕비와 사당이 보입니다.


이 길상사는
시주 길상화 김영한남이 보리심을 발하여 자신의 소유를 아무 조건없이 법정스님에게 기증하여 이루어진 삼보의 청정한 가람이다.
선하고 귀한 그 뜻을 오래도록 기리고자 돌에 새겨 고인의 2주기를 맞아 이 자리에 공덕의 비를 세운다.
마하반야바라밀
길상화 보살께서 사망(1999) 1년 후, 평소 본인의 뜻에 따라 첫눈 오는 날 이곳에 분골을 뿌렸고요 후에 같은 장소에 사당을 세워 추모의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답니다.


백석의 연인 자야가 보이시나요?
시인 백석과의 사연은 이러니 저러니 진위에 대해 아직도 말은 많습니다만...
군부정권 당시 정재계 인사들이 비밀회동 장소로 사용하면서 서울 삼대 요정(삼청동 삼청각, 성북동 대원각, 익선동 오진암)의 하나로 급성장하고, 외국인 기생관광의 명소로 통금도 없고 성매매 특별법 예외 대상의 업소를 운영하던 "여장부 사업가"의 느낌이 더 강하게 왔습니다.

가람의 맨 끝에 자리한 진영각입니다.
원래는 길상사의 주지 덕조(德祖) 스님께 법정 스님이 내렸던 법명 행지(行持)를 따라 행지실(行持室)이라고 불리었답니다. 주지스님 사무실 겸, 법정 스님께서 회주(법회 주관자)로 참가하실 때 휴식을 취하거나 차를 마시던 공간이었다네요.
그런데 법정 스님께서 병원에서 퇴원하시고 소속이었던 송광사(순천)로 모시기 전 마지막 밤을 여기서 보내셨고 바로 여기서 입적하셨답니다. 해설사 님의 설명으로는 다비 장소도 가깝고 어쩌고 해서 퇴원 후 이곳으로 모셨다는...
그 후로 법정 스님의 진영(眞影)과 유품 몇 점을 모시고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답니다.


진영각 마당으로 들어서 바로 오른편 담장 아래에 법정 스님의 유골 일부가 모셔져 있습니다.
표지판에는 이곳과 마지막 소속 사찰인 순천 송광사 불일암 후박나무 아래 두 곳에 모셔져 있고 그게 공식 입장이라는데요. 사실은 마지막까지 계셨던 강원도 오두막의 철쭉나무 아래에도 한 곳이 더 있다 합니다. 하지만 그곳이 사유지인 까닭에 공식적으로는 표기하지 않는다더군요.

수도자에게 있어서 고독은 그림자 같은 것이겠지요.
고독하지 않고는 주님 앞에 마주 설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단절된 상태에서 오는 고독쯤은 세속에서도 다 누릴 수 있습니다.
수도자의 고독은 단절에서가 아니라
우주의 바닥 같은 것을 들여다 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닐지요.
말하자면 절대적인 있음 안에 서 있는 자신을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요.
배부른 상태에서는 고독을 느끼지 못합니다.
주린 자만이 고독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고독을 배웁시다.
-진영각 전시 유물 중 이해인 수녀님께서 기증한 스님의 편지-
진영각을 둘러보던 처음에도, 해설사와 동행한 두 번째에도 내내 든 생각.
얽매이는 것이 싫어 송광사 불일암을 떠나 강원도 암자에 숨어들었으면서도, 10년의 시달림 끝에 결국에는 길상화라는 법명을 내리고 대원각을 길상사로 받아들인 것도 그렇고. 얽매이는 것이 싫어 주지도 마다하고 회주로만 참여하며 하룻밤도 등 한 번 누인 적 없는 곳이었지만 결국 이곳에서 입적하고 유골이 묻힌 것도 그렇고...
"구도자의 삶도 이러한데, 인생 참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정답이다"
빠삐용의 의자니 뭐시기는 장황설이 되니 패쑤허고...
길상사 일주문 밖 풍경입니다.
도착하는 내내 구불구불 오르락내리락... 참 정감 가는 길이었습니다. 서울에 살았더라면 몇 번이고 다녀갔음직한. 참, 경내에도 동네에도 개나리 대신 영춘화가 곳곳에 늘어진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해설사 말씀으로는, 꽃이 피면 경내가 참 보기 좋으니 기회 되면 다시 방문해 보라고 했습니다. 시간 되시면 꽃무릎 필 무렵에 한번 다녀오시길....

가까운 곳에 만해 한용운 선생의 심우장이 있습니다.
가파르고 꼬불꼬불한 좁은 고샅길을 올라서야 하는데요,

오르막 난간에서 마주한 글귀. 검색하니, 만해께서 세수 53에 쓰신 글이더군요. 평균 수명이 늘어 50이 불혹이래야 맞는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니 얼추 지금의 내 나이에 쓴 글귀입니다. 그런 글을 마주하니 지금의 내 생각과 다를 것이 없어 공감했습니다.


멀리서 보아도 범상치 않은 소나무가 그곳이 심우장임을 한눈에 짐작하게 해 줬습니다.



조선총독부를 마주하기 싫어 북향으로 지었다는 집.
건물 왼쪽 끝 마루 아래에 놓인 요강이 보이시나요?
그 시절이야 산중이건 어디건 당연한 필수품이었겠지만, 요강을 마주하는 순간 또 한 번의 공감이 ㅋㅋㅋ
(심우장이야 방이 좁지만 제 방은 그보다 곱절은 넓어 자다가 발로 찰 일은 없습니다)

심우장 방문을 마치고 인근에 위치한 [성북근현대문학관]을 둘러보고 귀가했습니다.
가난한 문인들이 많이 거주했던 성문 밖 산동네 성북.
이육사 조지훈에서 안수길 이태준 박경리 박완서까지... 성북구에서 기거하며 활동했던 문인들을 에둘러 구성해 놓았는데, 대부분이 내 모지 『백수문학』과 동시대에 활동한 작가들이고 실제로 작품을 수록했던 작가들이었는데...
세종시는 그런 귀한 자산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문화 아이콘으로 활용할 생각을 못하는지 씁쓸한 생각이...
태풍급 비바람의 예보에 걱정했더니 큰 지장 없이 잘 댕겨왔습니다.
관광버스 안에 "맛나게 커피를 내려오신 선생님" "컵 과일을 준비하신 선생님" "김밥과 물과 맥주와..." 먹거리를 이것저것 나눠 줬지만 돌아오는 차가 휴게소를 지나 도착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야 김밥을 꾸역꾸역 먹었습니다. 위가 50방 삐빠로 밀어 놓은 것처럼 쓰린 것이 잠시 만만해졌는데 또 요동칠까 걱정이었고, 컨디션이 그러니 창자가 더 짧아져 차 안에서 오줌보 터질까 지레 겁도 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부리나케 식모커피부터 한 잔 탔습니다.
힘 좋을 때 싸돌아 댕기는 것이 정답인 것 같습니다.
덕분에 핑계김에 모처럼 꿈 같이 콧바람 잘 쐬고 왔습니다.
참, 길상사 해설자님의 서울 말투가 사근사근 어찌나 귀티 있고 고급지던지요 ㅍㅎㅎㅎ
202504120818토
Paul Mauriat-El Bimbo
세종시인협회문학기행
-by, ⓒ '날로 젊어진다는' 구라의 주인공 詩人 성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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