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인을 만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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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ㅁ사랑방

그 시인을 만나고.

by 바람 그리기 2023.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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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세종시인협회 문학기행.

오산 휴게소 건립 조형물 (김밥, 물, 귤-신현자 선생님, 호도과자) 기형도 문학관 (친 누님의 문학관 해설) 기형도 신춘문예 당선 시 「안개」 더보기 ▷안완근.장석춘.안종일.성봉수.이선행.안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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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외출에서 돌아오며,
 간단한 술밥으로 저녁을 해결하기로 했습니다.
 편의점에 들러 담배사고 우체국 사거리를 지날 때까지, "시원하게 생맥주 한 잔 먹고 들어갈까?" 고민했었는데요, 한 잔이 한 잔으로 끝날 자신이 없어서 그냥 집 쪽으로 발을 옮겼습니다. 한참 흙냄새 맡을 배추 모종 물 때도 있었지만, 혼자 앉은 술자리의 청승과 얼른 들어가 물 구경하고 싶은 맘이 컷기 때문이었죠.

 그렇게 돌아와 배추 물 주고, 씻고, 맥주 큰 것 두 캔으로 술밥 마무리했습니다.

 그러고는 서재 책상에 아무렇게나 수북하게 쌓인 책 한쪽을 비집고 커피잔을 내려놓습니다.


 "시인을 키웠다"는 말로 그 모든 사정을 대변한 기형도 시인의 큰 누님.
 문학관 마지막 공간에 닿아 빙긋 웃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는데요, 지나치듯 짧게 뱉은 그 말의 표정에서, 감춰 놓은 큰 비밀을 살짝 털어놓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일단 발표한 시는 여러분의 시가 아니라, 받아들이는 독자의 것이 되어 읽히고 해석되니 여러분도 열심히 좋은 글 쓰시기 바랍니다"
 젊은 문학도들에게는 바이블처럼 여겨지는 기형도의 시. 그러니 그의 친구, 동료, 후배들에 의해 얼마나 많이 해석되고 분석되었겠어요. 그러는 과정에서 시인의 창작 배경을 너무 잘 알고 있는 본인 입장에서는 사실과 괴리되는 감정도 더러 느끼셨을 겁니다. 그런 상황을 조심스럽게 에둘러 표현한 듯싶은데요, 물론 제 추측입니다. 하지만 저 역시도 늘 해 오던 말이고 그래서 내가 출간한 세 권의 시집 어디에도 시평이나 창작 배경을 밝히지 않았으니 지나친 억측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전시 공간 두 번째 모퉁이를 돌아서며, 벽에 쓰여 있는 이 문구를 마주하고 잠시 뜨끔했습니다.


 "나는 한동안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기 시인의 시작 메모 중 일부분인데요, 문학관에서 마주한 감상이 새로웠습니다.
 여러 상황을 대비해 깊이 생각하면 내게 딱 들어맞는 말은 아니겠으나, "지극히 관념적인(내가 나 스스로 만족하며 내 시라 여기는 몇몇 시를 포함한...)" 내 시작(詩昨)이 발가벗겨지는 느낌을 받았고요, 그 감정이 사그라질 즈음 '어쩌면 그래서 당신은 그렇게 많은 시간을 거리 위에 있었구나...' 생각했습니다.


 기 시인의 독서 리스트라는데, 한 번쯤 견줘보면 재밌지 싶어 담아 왔습니다.


 영화 같은 영화관에서의 사망 전 직업이 기자였으니 여느 사람보다는 해당 분야에 대한 많은 정보 취득이 필요했겠거니 생각합니다(뒷면에도 써 있는 거로 보입니다).
 저는 비교하니 반띵 정도는 되는 것 같은데요, 그것도 등단 전 지적 목마름에 허덕이던 젊은 잡식 뇌의 시절 이야기이니 읽었던 반절의 책도 오늘의 자양분으로 썩어 사라져 버린 지금은 허수 같은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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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시인은 "성 시인과 똑 닮았다"라며 그의 초상 앞에서 사진 찍을 것을 권했고요, 어떤 시인은 "시의 색깔도 비슷하고(시가 무겁고 밝지 않은 점, 이 점은 저도 인정하는 바이지만 그렇다고...), 지난 책의 제목도 『검은(해)』이니 『(입 속의) 검은(잎)』에서 따 온 것"이라고 말하더이다. 말끝에 번뜩 떠오른 말이려니 생각하고 대꾸 없이 웃어넘겼지만, 참...
 하긴, 예전 어떤 SNS에서는 '이 상' 시인이 연상된다는 리뷰를 우연히 본 적도 있었는데...ㅎ

 솔직히 나는 기 시인의 시를 읽은 적이 없습니다. 싹싹 긁어모아봤자, 온라인에서 접한 "시작 메모" 일부분과 『입 속의 검은 잎』이 다인데요, 실력 있다고 평가받던 류 oo 작곡가의 실체가 "표절인"이 되어 쟁점이 되었을 때 부활의 김태원 씨가 예전 한 인터뷰가 새롭게 주목받았습니다.
 "나는 다른 곡을 듣지 않습니다. 내 무의식 어디에 잠들었다가 언젠가는 내 곡에 영향을 미칠 것을 삼가기 위함이죠"
 그런 인터뷰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다른 사람의 시를 읽지 않는 내 확신 없던 이상한 행위가 보상받는 느낌이었습니다(그렇다고 아예 손 놓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증 단행본의 경우는 감사의 뜻으로 쓰윽 훑어보기는 하되,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작가가 감춰 놓은 심상의 미로를 찾아 걷지는 않습니다-요즘 미로가 있는 시가 흔치도 않고요)
 물론 사람마다 다 환경이 다르고 창작의 방법도 다양하니 무엇이 선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문정희 시인께서 어느 회고에서 "포대기로 아이를 업고 밥을 하면서도 시집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라고 했었는데요, 이것 또한 등단 전의 상황이었고요. 역으로, 등단 전 치열한 수련이 필요한 이유이겠죠.


 모창 가수는 아무리 잘 불러도 모창 가수에 불가합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자기만의 음색으로 자기 노래를 불러야 그나마 가수로 인정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 유지되는 것이지요. 물론 음반 취입 전까지는 능력 있는 여러 선생님께 트레이닝을 받을 수 있다면 좋은 일이겠지만요.
 그래서 결론은 "내 안의 나를 얼마나 잘 끄집어낼 수 있냐?"가 모든 예술가의 진정성을 평가하는 핵심이지 싶습니다. 물론 대중 독자와의 공감대 형성의 문제는 별개의 문제이고요.


 기형도.
 "그냥 그 나이에 맞는 딱 그런 시를 쓴 시인"이 제 평가입니다.
 천상병 시인과 마찬가지로 "능력 있는 친구와 지인들 덕에 기억으로 남겨진 사람"이라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그가 요절하지 않고 살아 지금은 나 뭐시기 시인처럼 늙은 시를 쓰고 있다면 젊은 날의 그 어둡고 무거운 시들의 평가가 어땠을까요? 무뎌 굵어진 자신의 세월에 덮이지 않고 지금처럼 살아남아 있을까요?
 젊은 시절 칼끝 같은 심상으로 민요조 북채를 두드리며 앞서 가더니, 천수를 다할 동안 오욕의 밭에 뒹굴다 떠난 김지하 시인의 평가처럼 말입니다.

 중얼거리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지금 도착하는 책을 모두 읽다 보면, 잡부 나갈 시간도 없것다"
 책 많이 읽는 것,
 우리 나이에는 그것도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특출 난 능력임은 분명합니다.

 죽은 기 시인이 다시 태어났다가 또 죽고도 6년을 더 살고 있는 나.
 늙은 시를 쓰지 않으려고, 순해지지 않으려고, 순한 귀가 된 지금도 나는 애쓰고 있습니다.

 

 
 20230910일
강촌사람들-송학사2023
 20230910일

 -by, 詩人 성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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