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습니다. 그러니 그리 아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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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ㅁ사랑방

이렇습니다. 그러니 그리 아소서.

by 바람 그리기 2023.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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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부에서 돌아와 그길로 되짚어 나가 휘발유를 사서 돌아왔습니다. 창고에서 예초기 두 대를 꺼내 차례로 기름 넣고, 엔진 열 받을 때까지 운전하며 멈췄다가 다시 시동 거는 것을 몇 차례 하며 벌초를 위한 정비를 마쳤습니다.
 아들이 작년에 새로 장만한 4행정 엔진의 예초기는 휘발유와 엔진 오일을 따로 공급하니, 창고에서 일 년 먼지 덮어썼다고 시동 터지는 데 지장 있을 걱정이 없었습니다. 물론 새것인 이유도 있지만요.
 제가 쓰는 2행정 엔진 예초기의 경우, 처음부터 휘발유에 엔진 오일을 일정 비율로 섞어 사용하는 제품이니 해마다 첫 시동을 걸기가 고역입니다. 실린더 내부가 일정 부분 진공이 된 상태에 유입된 연료가 점화플러그에서 튄 불꽃에 폭발이 일어나야 하는데요, 그 첫 번째 폭발을 일으키는 과정이 고역입니다. 한 해에 딱 한 번, 선영 벌초 때에만 사용하니 분해해 닦고 기름치고 잘 정비해 넣어뒀어도 그렇습니다. 꼭 어깨가 매달리고 똥꼬에 힘 빠져서 육두문자 터져나올쯤은 되어야 시동이 걸립니다. 그렇지 않아도 늘어붙은 어깨 통증에 징징거리는 요즘이니 염려가 앞섭니다.
 '어라?'
 올해는 신기하게도 단 한 방에 터졌습니다.
 '울 엄니께서 내 어깨 빠진 걸 아셨나 뷔?'

 명절 2주 전에 한 벌초가 가장 이쁘니 해마다 그 무렵에 벌초하는데요, 이번엔 주말 동안 비 예보가 있으니 한 걱정입니다. 그래도 어쨌건 명절 전 어느 날에는 지고 올라가야 하는 일이니 미리 꺼내 손 봐서 한쪽으로 옮겨 뒀습니다.
 그런 후 씻고 들어와 서재 컴에 음악을 재생시켜 놓고 개수대에 서서 설거지하고 있는데요, "둘 다섯의 먼 훗날"이 흘러나오는 겁니다.
 〈AB형의 시인〉
 '복잡한 피에 뜬구름 먹고 사는 이'라는 게 '노래 한 구절' '바람 한 올'에도 종잡을 수 없이 감정의 파도가 뒤집히고는 하는데, 순한 귀가 된 지금도 그 정도가 나아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또 꿀꿀해졌겠지요.
 '막걸리나 한잔 먹고 올까...'
 설거지를 마치고 고무장갑을 뒤집어 벗어 걸어 놓는 순간 전화가 울립니다.

 참 고마운 친굽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쪽저쪽으로 허기지던 차에 남에 살에 이슬이로 술밥 맛나게 먹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종일 어제 생각을 했습니다.
 '김강석?' '김강석이 누구였지?' '김광석?' '들어보기는 했는데... 뭐 부른 가수지?'
 뮤지컬 이야기를 하다 말고 친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빤히 쳐다봅니다.
 "왜 그랴? 왜, 대구 가면 거리도 있고, 와이프가 죽였다는 썰도 있고, 뭐 이런저런 노래 불렀잖어!"
 친구가 말한 대구에 있는 추모 거리도 알고, 와이프가 죽였다는 썰도 알고(심지어 내 방에 예전 포스팅한 기억도 있고), 불렀다는 이런저런 노래(로 내가 지은 시도 있고)도 알고 있고, 알겠는데...
 정작 그 "김광석"이라는 이름이 처음 듣는 것처럼 생소한 겁니다. 얼굴도 기억나고요, 목소리도 기억나는데, 이름 석 자가 그 모든 것과 전혀 연결되지 않고 저 먼 기억 밖 안드로메다에 덩그러니 따로 놓여 있는 겁니다. 
 대화를 이어가면서도 반 쪽의 내가 반 쪽의 나에게 술자리가 파할 때까지 계속 물어봤습니다.
 '뭐지? 이 상황이 뭐지?' 

 요즘 들어 이런 당황스러운 경험의 자각이 몇 차례 있었습니다.
 분명히 나눈 말인데, 하얗게 지워져 했던 말을 또 하고 있고. 분명히 들은 말인데, 하얗게 지워져 전혀 기억 못 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오늘처럼 하루쯤 지나며 골몰하면 그제야 어렴풋이 기억해 내고 기억하는.


 제가 요즘 그렇습니다.
 안경 쓰고 안경 찾으러 이방 저방 다닌 것은 차라리 헤프닝이고요, 사람 이름 기억해 내는 건 점점 더 힘들어지고 이름을 기억하지만,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사람도 있고요.
 언제부터인가,
 모든 것을 기억하지 않고 그때그때 마주치는 순간과 상황 안에서만 생각하기로 작정하고 의식적으로 애쓰며 지내왔는데, 아무래도 그때부터 머릿속에 정체불명의 벌거지가 잠에서 깨어나 나를 갉아 먹고 있는 게 확실한 거 같습니다.

 제가 요즘 이렇습니다.
 얼마지 않아 이름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고, 얼굴도 기억하지 못할 거 같습니다.
 만약에 말입니다.
 만약에  어느 거리에서 몰라보고 지나치는 저를 보시걸랑,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내가 알지 못하는 머나먼 그곳으로 떠났구나"

 여겨 주소서.

 

 
 202309152841금
 김광석-거리에서
 비 참 많이 오시네... 어라? 천둥 번개는 또 뭐랴?

-by, ⓒ 詩人 성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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