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피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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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 끽연

보이스피싱

by 바람 그리기 2022.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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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출에서 돌아오는데 아버지께서 급하게 골목을 나오고 계신다. 상아색 면바지 위에 면도날처럼 반듯하게 잡힌 주름이 눈에 들어온다.

 젊은 아버지께서는 퇴근하시면 씻고 양복을 갈아입고 머리칼에 포마드를 발라 빗어 넘기고 향수를 뿌리고 집을 나서셨단다. 무도장으로 향하는 그런 아버님께 "어디 가셔유?"란 한 마디조차 건네 본 적이 없다고. 왜 그땐 그리 등신 같았는지 모르겠다고. 양 젖에 아이들을 물리던 배고프고 고단하던 젊은 시절을 회상하실 때마다 어머님께서 가끔 푸념하곤 하셨다.
 아버지께서 새로 장만한 옷은 석고 본을 뜨듯 품이 꼭 맞아야 했으니 옷소매 역시 팔목 언저리를 조금이라도 벗어나거나 모자라지 않도록 언제나 수선의 가위질이 거쳐야 했다.
 그러니 대문 밖으로 단 한 발짝을 딛더라도 외출복으로 갈아입는 수고는 당연하셨다. 아무튼 당신의 그런 노력 덕분이었는지 집 밖에서 마주하는 기억 안의 아버님은, 내 유년은 물론이고 성년이 되어서도 늘 단정하고 깔끔하게 품격을 잃지 않으셨다. 바트다 싶을 정도로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으셨던 아버님과는 달리, 나는 어려서부터 여지껏 크다 싶을 정도로 넉넉하게 옷을 입고 소매가 길면 접어 올리고 입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렇게 된 배경을 추측해보면, 모두가 빈곤했던 시절 아이들에게 새 옷을 입힌다는 게 일 년에 기껏해야 설이나 추석을 앞둔 두어 차례뿐이었는데, 남자 형제가 없으니 물려받지도 물려주지도 못하는 내겐, 해 넘어까지 입을 수 있도록 늘 큰 옷을 입힌 공무원 박봉의 흥보엄마가 선택한 최선 때문이었지 싶다
 옷은 그렇다 치고, 종종 주먹만 한 눈곱을 매달고 새집 얹은머리에 슬리퍼를 끌고 아무렇지 않게 일을 보러 밖에 나서는 나를 생각하면 아버님과는 분명 성향적으로 다르긴 한 것 같다. 이런저런 성격이 서로 장단점이 있겠으나, 남의 눈을 신경 쓰지 않는 나름의 자존과 자유로움이 어찌 보면 게으르고 배려심 없는 멋대로의 방종일 수 있겠다는 깨달음이 번뜩 든 때가 있었다.
 인근 D 시의 상급병원에 입원하신 어머님을 뵈러 아내와 함께 길을 나섰다. 그때도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행색으로 병실에 들어섰는데, 순간 어머님의 눈빛이 보내는 무언의 말씀이 들려왔다. 그러고는 얼마 되지 않아 며느리에게 소곤대는 목소리.
 "애미야, 이런데 올 때는 애비 양복은 안 입고 오더라도 깨끗한 옷이라도 갈아입혀 와야지... 의복이 허술하면 남들이 까니 보는 겨..."
 "갈아입은 건디유…."
 사실, 그날 옷장 서랍에서 빨아 놓은 옷을 꺼내 입고 나선 길이었지만 신고 있던 슬리퍼가 결정적이었던 듯싶다. 그렇게 꾀죄죄하고 추레한 모습에 슬리퍼가 일정 부분 역할을 했겠으나 나름 차려입고 나선 모습이 그랬으니 평소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변명의 여지가 없는 노릇이다.
 병원 입원환자의 하루란 것이 회진 마치고 밥 먹고 TV 보고…. 어떤 환자의 냄편이며 자식이며, 그들의 직업이며, 누구는 문병을 오며 누구는 왜 아무도 안 오며... 궁금증을 만들고 답을 추측하고 뒷담화 나누는 것이 일상이다. 그런 한복판에 계신 자존심 강한 어머니께  짜안, 등장한 아들의 꾀죄죄한 모습이 영 탐탁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며느리를 소곤소곤 타이르는 어머님 말씀을 귀 너머로 듣고 뜨끔했던 그 기억, 지금도 얼굴이 달아오른다. 아무튼 그때 이후로는 "뭐시기 아들, 뭐시기 아빠"라는 책임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으니, (마음만 ㅋㅋㅋㅋ) 공식적인 자리에 슬리퍼 차림은 가능한 한 자제하며 살고 있다.
 (역시, 살 붙여 뼈대 만드니 얘기가 삼천포로 한도 없이 빠진다. 그러니 일단 여기서 멈추고…….)

 "애비야, 모자 좀 잠깐 바꿔 쓰자꾸나."
 면바지에도 날을 세워 입고 나오시는 아버지께서 땀으로 얼룩진 모자를 벗으며 말씀하신다. 백발까지 깔끔하게 빗어 넘기셨으면서 방금까지 마당에서 뚝딱거리며 쓰고 계시던 모자를 그냥 쓰고 나오신 걸 보면, 무언가 급한 용무가 있으신가 보다.
 '왜요? 아버지. 무슨 급한 일이세요?' 모자를 건네드리며 여쭌다.
 "할머니께서 돈 20만 원 부치시래요" 할아버지 뒤에 서 있던 둘째가 코를 훔치며 대답한다. 그러고 보니 아버님 손에 통장이 들려 있다.
 '왜요, 아버지! 엄마 무슨 일 있으시데요?'
 서울 큰 이모 댁 근처에 방 하나를 얻어 휴식 겸 놀이 가신 엄마. 올라가신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워낙 활동적이고 호탕하신 어머님이니, 일주일의 외출은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었는데 그런 어머님이 돈을 보내라 하셨다니 이상하다. 정 돈이 필요하시면 옆에 약국집 사모님 큰이모도 계시고, 일가를 이룬 두 딸도 서울에 살고 있는데 말이다.
 "에이, 징기러워 죽것어. 점집이 있는데 매일 거기 가서 복채를 내느라 돈이 떨어졌단다. '그만 가야지, 하다가도 하루라도 안 가면 뭔가 자꾸 서운하다'며 거기 또 가려고 그런단다"
 "어!"
 걸음을 서두르시던 아버님께서 빠뜨린 도장을 챙기러 다시 돌아서신다.
 그런 아버지를 따라 마당 안으로 들어서며 말씀드린다.
 '아버지, 제가 여기서 폰으로 보내드리면 돼요. 우체국 가실 생각 마시고 옷 갈아입으세요. 지금 바로 보내드릴게요. 엄마 계좌로 보내면 되죠?'

 폰을 열고 꼼지락 거리는데 당황스럽다.
 '어, 그런데 엄마 돌아가셨잖어? 엄마 통장이 없는데? 어디로 어떻게 보내라는 겨?'


 메기 매운탕.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모시고 나선 외식 때였으니 꼭 7년 만이다.

 

  선배님 전화 받고 나가 한 잔 빠진 쐬주 한 병 곁들여 점심 먹고 돌아와 까뭇 잠들었다 깼다.


 '병신, 모자란 놈. 엄마가 보내라는데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얼른 보내지 못하고 거기서 보이스피싱을 따지고 있었으니... 돌아가신 어머님이 돌아가신 남편께 하신 부탁을 막고 있었으니...'

 

 

 

 
 배고푸다. 한술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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