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구 씨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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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ㅁ사랑방

봉구 씨의 하루

by 바람 그리기 2024.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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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구 씨가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종일 추적이며 봄비가 내리는 오늘도 봉구 씨는, 대부분의 여느 날과 다름없이 이따금 사타구니를 벅벅 긁으며 가장 잘하는 것을 하다 보니 어느덧 반나절이 얼추 기울어가고 있었다.
 "아, 배고프네. 뭐 좀 먹을까?"
 가장 잘하는 것을 하며 시간을 흘려보내도 어김없이 찾아오는 허기. 그럴 때마다 봉구 씨는 "에너지 총량(보존)의 법칙"을 떠올리며 신기해하고는 한다. 그러면서 그가 가장 잘하는 것에 대한 당위성을 스스로에게 각인시키는 것이었다.
 "그래, 배가 고픈 것을 보면 분명 에너지 소모가 있었다는 것이고, 나는 그만큼 뭔가를 했다는 증거일 테니 구태여 '식충이'라고 자학할 필요는 없는 겨!"

 봉구 씨는 모아두었던 김치 꽁다리를 넣고 어제저녁 냄비 가득 끓여 놓았던 청국장을 한 대접 덜어 레인지에 돌려 아점 상을 차려 앉았다. 어제저녁, 밥통을 박박 긁어 한 그릇 채운 밥에서 반 그릇을 덜어 오늘을 위해 남겨 두었던 밥을 한 수저 떠 청국장의 폭신하고 두툼한 두부를 하나 얹어 우물거리며, 어항 속 한 마리 남은 열대어에게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린다.
 "두부를 넉넉하게 넣어 청국장 끓이기를 잘했지? 이만하며 속은 찰 껴. 나부터 먹고 줄 테니께 쬠만 지둘려라!"
 이틀째 꼬박 떠들고 있는 텔레비전 뉴스프로그램에서 "이낙화 전 총리가 빅텐트를 허무는 기자회견"이 진행되고 있다.
 "으이구, 잡눔덜..."
 봉구 씨는 한 시간 후 예정이라는 "이싸가지의 대응 회견"을 기대하며, 유튜브 알고리즘이 재생시켜 주는 동영상을 습관처럼 열어 밥상 한쪽에 비스듬히 세워 놓는다.
 "이 싸가지에게 이번 축구 국가대표 분란의 주인공 '이MZ'에 대한 입장을 물어보는 기자가 왜 없을까? 내가 보기엔 정신연령이나 하는 짓거리가 슷비슷비 한 놈인데, 뭐라 또 갈라치는 말을 할지 궁금허네?"

 봉구 씨는 밥상을 한쪽으로 밀어 놓고 한 봉 남은 식모커피를 타서 담배를 물고 핸드폰 설정 창을 연다.
 "예전 폰 설정과 내용을 그대로 옮겼으니 별다른 것은 없겠지만, 그래도 한 번 살펴주는 게 예의 것지?"
 영구가 아버지 봉구 씨에게 생일 선물로 사전 예약하고 보름 전 건넨 최신 핸드폰 갤럭시s24 울트라. 리퍼 제품을 사서 쓰던 갤럭시10 울트라에서, 설정이나 파일을 그대로 옮겨 놓았으니 딱히 손 볼 것은 없는 일이었으나, 방금 밥상머리 유튜브에서 마주한 제품 리뷰에 뒤늦게 귀가 팔랑거렸던 것이다. 그가 가장 잘하는 것만 해도 길지 않은 하루일 텐데, 보름이나 지난 후에 뜬금없고 새삼스러운 일이었다.

 봉구 씨는 졸보기를 벗어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밀쳐두고 이것저것 차례로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의료정보와 재난문자"라는 부제가 달린 <안전 및 긴급> 설정 창으로 들어간다.
 "음, 여기 있었구나!"
 새 폰으로 바꾼 후 시도 때도 없이 도착하는 이웃 도시 "청풍"의 재난 문자가 귀찮아 그렇지 않아도 언젠가는 수신 거부 설정을 해 놓으려 하던 참이었다. 수신 거부 설정을 마치고 이번에는 차례대로 "긴급" 설정 창으로 들어간다.
 <긴급 번호로 지정되어 있는 연락처에 5초간의 현장 음성 녹음과 위치정보가 전송됩니다>
 "오우, 유용한 기능이네. 염통 움켜쥐며 고꾸라질 때야 버튼 다섯 번을 누를 시간도 없겠지만, 세상사 모르는 일이니 일단 설정해 놓아서 손해 볼 것은 없는 일이지..."  
 봉구 씨는 해당 기능으로 위기를 모면했다는 뉴스 사건 보도 내용을 어렴풋이 떠올리며 설정의 마지막 화면을 터치하는 것이었다.

 "띠롱, 띠롱, 띠롱..."
 화면을 터치하자마자 연달아 울리는 알림 소리에 봉구 씨는 화들짝 놀라며 꾸부정하게 숙였던 허리를 빨딱 세워 고쳐 앉으며 소리치는 것이었다.
 "아이고, 저때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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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현장 녹음과 위치정보가 첨부된 긴급문자>가 누님들과 삼월이 언니와 아이들에게 전송되고, 잽싸게 "폰오류" 문자를 보내느라 식은땀을 흘렸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참 희한한 경험을 했습니다.
 긴급 문자가 전송되자 바로 삼월이 언니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이게 뭐래유?"
 ㅋㅋㅋㅋㅋ
 평소에는 아침에 보낸 연락을 퇴근하고 집에 도착해서야 확인하는 가장께서 즉각적인 피드백이라니요? 참 희한한 일이 다 있습죠?
 삼월이 언니와 통화하는 동안 둘째 누님께서 보낸,
 "이게 뭐야? 무서워서 안 열어볼래..."라는 문자가 도착했고요.
 허겁지겁 '폰오류'라는 문자를 보낸 후,
 큰아이의 "예" 막내의 "진짜 오류지요?"... 라는 문자가 꼬리를 물고 도착하고요... 
 하이고, 어벙벙 꼼지락거리다가 식겁했습니다.

 그리고 설거지하는 동안 담가뒀던, 속 옷과 양말을 문지르며 생각했겠죠!
 '아니, 긴급문자를 받았으면 112에 신고를 해야지 다시 전화해서 물어보는 건 또 뭐여?'
 그러면서 또 생각했습죠.
 '아니지, 아녀. 만약에 그랬더라면, 사이렌 왱왱 울리고... 와당탕 대문 열리고... 삼월이 죽을 듯 짖고... 삼월이 언니가 삼월이 언니답지 않아서 벌어졌을 그 황당하고 번잡스러운 상황을 어째쓰까나!'

 그래서 나도 모르게 떠올리게 된,
 "다움의 미학(美學)"
 삼월이는 2% 부족한 삼월인 대로, 삼월이 언니는 삼월이 언니인 대로의 '다움'.
 현실적 본질에 대한 긍정, '다움'.
 삼월이 언니께서 삼월이 언니다워서 다행이고 감사한 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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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 이상 없는 실수"라고 몇 번을 고개 조아리며 사과한 봉구 씨는, 비상 출동한 경찰관을 배웅하고 돌아서며 머리를 긁적거리며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그려! 내가 할 줄 아는 것만 해도 하루가 짧은디... 앞으로는 그렇게만 살아야 하는 겨!"

 

 
 202402202632화 
 Two In One-Now and Forever
 종일비.
 '온 친족을 언제 긴급연락처로 저장해 놓았지?' 곰곰 생각하니, 환우 중인 어머님 모실 때였나 보다. 차마 지우지 못하고 있는 번호들, 이젠 정리도 해야겠고...
 빨래. 김치. 식모커피. 브로콜리. 담배.

 -by, ⓒ 성봉수 詩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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