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어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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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ㅁ사랑방

식어가다.

by 바람 그리기 2025.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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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부모님 뵙고 와 부엌 구석에 던져두었던 오징어를 구워 쪽쪽 찢어 용기에 담아 냉동실에 넣어두었습니다.
 아주 가끔, 입이 구진하고 건건찝찔한 것이 먹고 싶어지면 두어 쪽씩 꺼내 먹고는 합니다.
 어릴 적 마른오징어는 구경하기 힘든 참 귀한 음식이었습니다. 빡빡머리 시절 하숙집 뒷방의 술안주는 열에 여섯은 부순 라면에 스프를 뿌려 대신했습니다. 그러다가 내 번 돈으로 술을 마실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오징어가 열에 여섯은 안주가 되었지요. 기차 안, 홍익회의 이동 판매 구루마에 실려있던 물렁한 조미 오징어는 또 얼마나 별미였게요.
 구우면 감칠맛이 배가 되지만 씹기가 나빴고요, 그렇지 않으면 씹는 맛이 부드럽고 본래의 향취를 느낄 수 있어 좋았습니다. 커피가 뜨거워도 식어도, 그마다 고유의 풍미를 느낄 수 있어 다 좋아하는 것처럼 오징어도 그렇게 먹었습니다.
 그렇게 좋아하던 음식이, 나이가 들며 이가 시원치 않아지면서 자연스럽게 멀리하게 되었지요. 먹기 위해서 일부러 사는 일이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더니 말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시원찮은 이빨로도 오징어를 먹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입안에 넣고 침으로 푸욱 불려서 천천히 우물거려 먹게 된 것이지요. 꼭 그렇게까지 해서 먹을 일이 무엔가?도 싶지만, 앞서 말씀드렸듯 먹기 위해서 일부러 사는 일은 없으니, 오늘처럼 이렇게 손에 넣은 경우에 구워 찢어 냉동실에 넣어 두었다가 그리한다는 말입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고.
 마치 아이들 클 때 오징어 다리 하나를 퉁퉁 불도록 입에 물고 온종일 돌아다니던 것만큼은 아니더라도, 뭐 그렇게 비스름한 형편의 오징어가 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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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이란 것이 그런 것이지요.
 내 의지로 선택하고 거칠 것 없이 맛보던 용감한 미각은 가을볕만큼이나 쉬이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지요.
 그 미각을 맛보기 위해 현실의 울을 벗어나 나 혼자 바다로 떠나는 일은 어렵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저,
 성한 이의 단단하던 열정을 기억의 체액으로 불러내어 회상할 뿐이지요. 그마저도 아직은 놓지 않은 혼술이 있어 가능한 일이고요.
 그런 것이지요.
 "전부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는...
 세월이라는 것이.

 

 
 202504202451일
 소리새-새벽을 기다리며 mix 2025
 김치통 정리/ 자가 벌초/ 화분 정리/ 자폐1,2호 술밥.

-by, ⓒ 당신에게서 늙어가는 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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