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한이 삼경인제...
본문 바로가기
낙서/┗(2007.07.03~2023.12.30)

은한이 삼경인제...

by 바람 그리기 2022. 10. 25.
반응형

 

 

 

 

 유년기 내 장난감은 하모니카였고 더 어렸을 적엔 연적(硯滴)이었습니다. 물고기, 기와집, 동그랗고 네모나고... 형형의 연적마다 푸른 안료로 그린 그림이 담겨 있었습니다. 쓰임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그 조그마한 자기에 물을 담으면 자동차도 되고 배도 되고 술병도 되고...
 지금은 흔적조차 없어진 지 오래이지만, 손에 잡히는 것이 웃어른들이 쓰시던 문방사우였습니다.




 초등학교 언제인가요? 그 시절만 해도 방학 숙제에 빠지지 않는 것이 서예(붓글씨)였습니다. 늘 그렇고 여태 그렇듯 개학을 코앞에 두고야 부랴부랴 붓글씨를 써서 제출했습니다. 방학이 끝나면 전교생의 과제물 중 반별로 수작을 뽑아 일정 기간 전시한 후 등수를 매기고 상을 줬는데요, 담임께서 제 서예를 물끄러미 보시더니 다른 문구를 제시하며 며칠까지 다시 써오라 하십니다.
 또박또박 이쁘게 잘 쓴 다른 동무들의 것이 두어 점 있었는데, 꼬불꼬불 이상하게 쓴 저를 뽑아 학급 대표로 다시 써오라고 하는 것에 아이들이 웅성거렸습니다. 잘해야 여덟 글자 정도였던 거로 기억되는데요, 그때 저는 한글 정서가 아니고 전교에서 유일하게 초서(흘림체)를 써 갔습니다. 물론 누가 그리 시킨 것도 도움을 받은 것도 아니고 그저 사전(지금도 그런 사전이 있을까요?) 낱말에 병기된 붓글씨 흘림체를 보고 흉내 냈던 것뿐이었습니다.
 노느라 정신 팔려 지내다가 그 며칠의 마지막 날 밤입니다. 신문지에 대충 몇 차례 쓰다가 문종이(한지)에 정식으로 쓰는데 영 맘에 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네 장뿐인 종이를 다 써버렸으니 그중 그나마 제일 나은 놈을 가방에 챙겨두었다가 그다음 날 등교해 선생님께 드렸습니다.
 제 서예를 받아 든 선생님의 눈빛에 언뜻 비치던 실망감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최선을 다해 쓴 거니?"
 '...네...'
 "그럼 되었다"
 모깃소리만 하게 대답하면서도 순간 죄책감과 미안함이 들었습니다. 물론 그 순간뿐이었고요, 당연하게 붓글씨 부분의 수상은 정자체를 쓴 6학년 다른 반 아이에게 돌아갔습니다.




 드디어 밀렸던 청탁 원고를 모두 보냈습니다.
 어느 곳은 미발표 신작을 보냈고 어느 곳은 아직 지면화 되지 않았지만 이미 다른 문학지에 보내 놓은 신작을 보냈고 어느 곳은 그런 것을 섞어서 보내기도 했습니다.
 요 며칠, 개학을 앞두고 밀린 숙제 몰아치기 하는 것처럼 시를 기웠습니다. 원고를 모두 보내고 나서,
 "최선을 다해 쓴 거니?"라고 물어보시던 그때 초등학교 선생님의 실망하신 눈빛이 떠올랐습니다.
 시를 기우며, '하이고, 이렇게 해서 보낼 게 아닌데... 시간을 두고 좀 더 기워야 하는 시인데...'라는 생각이 가득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미 지면화 된 시도 다시 기워 다른 책에 발표하고, 또 어떤 교수님은 그런 행위를 적극 추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는 한 번 지면화 된 시는 어떤 경우에도 다시 손 보는 일이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얼굴이 달아오르며 유혹받기도 하지만, '그때는 그때의 감정' '그때는 그때의 최선'이라고 여기며 다시 손보는 일이 없습니다. 출간한 세 권의 시집 또한 그러했으니 문체나 사상이나 천차만별이라서 '시인의 정체를 파악하기가 참 애매하겠다'라는 생각을 하며 지냅니다. 그런 나이니, 급하게 방학 숙제하듯 깁고 있는 시에 대해 맘 한편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고요. 어쨌건 배는 떠났고, 그래도 이 가을엔 양심적으로 우려먹기를 안 해서 다행입니다.




  "최선을 다해 쓴 거니?"
 그 후로 얼추 반세기가 흐르는 동안, 참 많은 분이 내게 기대했고 믿어줬는데 늘 실망하게 했다... 생각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내 능력을 과대 포장하셨을 수도 있었겠지만, 부모님에서 시작해서 선생님 친구 선후배에 이르기까지 경우마다 참 많은 성원과 지지를 보내며 기대했는데, 단언컨대 그 기대를 만족하게 한 것이 단 한 차례도 없지 싶습니다.
 왜 밀린 방학 숙제하듯 그렇게 살아왔는지 모를 일입니다. 
 게으름일까요?
 아니 그것보다는 세상을 너무 만만하게 보는 못된 심성 탓인 거 같습니다.
 룸비니 동산에 그분도 아니면서...


 바람종이 종일 울던 오늘.
 오래된 집 마당엔 고욤 잎이 떨어져 날렸습니다.



 아직은 푸른 잎이 많은데, 저 잎을 모두 떨구고 하늘을 맨살로 받치는 날이 오면 그 받친 손이 모두 베어질 거라는 걸 나무는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원고도 모두 보냈고,
 방류 전의 시화호 같던 어항도 명경처럼 청소하고 보온 히터도 틀어줬고,
 다가올 행사에 맡은 일도 마무리했으니 속은 시원합니다.

 설악산 강원도 쪽에는 대설 경보까지 내렸다는데,
 올가을도 몇 년째 벼르는 단풍 구경은 물 건너간 듯싶습니다.
 해마다 홈쇼핑 보온 매트에 턱을 빼고 지내다 겨울 다 보내는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은 번데기 데워 혼술하려다 말았습니다.
 (밤은 비록 무야(戊夜)라도 내일 잡부도 없고 해가 게을러졌으니 새벽 공복이 어찌할지 아직 모르는 일이지만...)
 출근 길, 고추 안 얼도록 단디들 챙기시고요.

 


 
 202210242721월
 이선희-알고 싶어요.
 드디어 서재 창문 반쪽을 닫다.
 '요즘도 고추장으로 밥 비벼 먹는 사람 있나?'
 저녁 먹거리가 변변치 않아 고추장에 비벼 먹으며 갑자기 든 생각.
 촛불 버스를 또 운행 한다는데, 솔직히 참여하고 싶은 맘이 안 생기네.
 기껏 만들어줬더니 이익단체 눈치 보느라 개혁 입법 하나 변변하게 처리 못 하고 4년 동안 헛발질만 한 놈들에게...
 아이고, 남 고추 걱정은 관두고 발 시려 죽것네 ㅉㅉ

-by, ⓒ 詩人 성봉수

 

 

 

반응형

'낙서 > ┗(2007.07.03~2023.12.30)'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염병, 뭤같은 세상!  (0) 2022.10.30
문밖의 나  (0) 2022.10.29
머리 아파라.  (0) 2022.10.23
딱하다  (0) 2022.10.22
성문 밖에서 집으로.  (0) 2022.10.21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