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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5일.
할머니 제사가 남은 것을 깜빡하고 증조모님 기일을 올 모셔야 할 마지막 제사로 착각했다.
몸 상태가 안 좋았던 어머니를 지키고 있는 동안 연아가 제물을 준비해준 덕분에 잘 모셨다.
간밤에 흔적들을 정리하려 설거지를 한다.
내가 포기하고 외면하며 운명이고 팔자라 여기며 내려놓았던 것들이, 개수대 거름망 구멍마다 누런 피고름이 되어 끈적끈적 흘러내리고 있다.
잔반통에 거름망을 엎고, 비워지거나 떨어지지 않는 피고름들을 손가락으로 훑어 내렸다.
시궁창 썩는 악취가 손가락에 배어 비위가 확 상한다. 어쩌면, 손가락이 아니라 내 코에 밴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아무튼 코를 통해 인식된 악취가 골 안을 한 번 휘젓고 온몸으로 퍼져 내려 심장의 과박동을 유발했다.
누구의 삶인가?
나는 누구의 삶을 살고 있는가?
내 외면은 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누구의 것에 보탬을 주지 못하는, 잉여.
불쌍하고 가엽다.
효용성 없는 잉여 인간.
오늘을 지키고자 포기한 내 것이 너무 많았다.
우주의 축은 나를 빗겨 멀리서 돌고 있노니….
설거지하다 말고 콩을 갈아 커피를 내렸다.
찬장에서 이쁜 커피잔을 꺼내고
골바람 매운 오래된 집 마당에 앉아
오욕과 절망과 무기력한 시간의 늪에 빠진 나를 마신다.
윈드벨이 쉼 없이 바람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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