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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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ㅁ사랑방

잘 지냅니다.

by 바람 그리기 2023.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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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종 소리가 이상합니다.
 겸사겸사 담배를 물고 비바람 거센 밤을 나섰습니다.
 바람종의 손이 서로 얽혀 아우성칩니다.


 어젯밤의 일입니다.

 느리게 올라오던 태풍이 꼬리쯤 걸쳤을 낮.
 엄두가 나지 않아 그냥 들어왔던 바람종의 손을 풀어헤쳤습니다.


 평상 위에 또 의자를 놓고 올라가 고개를 치들고 팔을 위로 뻗어야 하는 일.
 가끔 있는 일이긴 해도 늘 위태롭고 인내심이 필요한 일입니다.
 다용도실 전등을 갈러 올라선 의자에서 넘어져 팔이 부러진 것이 불행의 도미노 첫 블록을 건드린 것처럼 지병으로 가는 운명의 시발이 되었던 큰 누님이 생각나는 불편한 일입니다.
 득도한 맹인이 실을 꿰는 형국으로, 깊은 곳에 아직 남아 있거나 세월의 힘으로 봉인한 다혈질의 버럭 성질을 거듭거듭 꾹꾹 눌러야 하는 일입니다.

 바람이 직조한 사방팔방의 가늠 없는 매듭을 상처 없이 되돌리는 일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느리게 올라오던 태풍의 꼬리쯤 걸쳤을 낮.


 밤새 몰아친 비바람을 생각하면 모두 꺾이고 부러졌을 토란대가 멀쩡하니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
 이렇게 미리 모두 묶어 놓은 어제 아침의 그 사내에게 고마워했습니다.

 여름 한 계절 나는데, 정확하게 한 병 반이 소비되는 액체 전자 모기향.
 어제 외출했다가 돌아오며 사 올까 말까 망설였더니 결국 밤사이 매미 허물이 되셔서 발정 난 모기에게 육보시했습니다.

 말복입니다.
 삼복이 다 지나도록 복달임 없이 넘어가는 일, 올해도 부작의 루틴으로 봉숭아 꽃물을 드린 사내에게는 서운한 일입니다. 모기향을 사 오며 이것저것과 함께 삼계탕을 한 봉 모셔 왔습니다.
 부엌에 선 김에,
 가지 찌고 찢어 간하며 볶아 남은 여름 먹을 냉국 한 통 만들고요. 그러는 한쪽으로는 가지 찌는 동안 손질한 브로콜리를 가지 찐 물에 데쳐 식혀 물 빼서 용기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 뒀고요. 그러는 한쪽으로는 브로콜리 데치는 동안 물에 담가 박박 비벼 소금기 빼고 꼭 짜서 듬성듬성 칼질했던 미역 줄기 데쳐 냈고요. 그러는 동안 가지 찌기 전에 미온수에 담가 뒀던 검은콩을 미역 줄기 데친 물에 삶기 시작했고요. 그러는 동안 한쪽으로는 가지 볶은 냄비에 미역줄기 간하고 볶아 홍고추 하나 썰어 넣고 마무리해서 담아 치웠고요. 삶아 적당히 무른 콩에 조선간장, 왜간장, 다시다, 액젓 가미해서 졸이기 시작했고요. 그러는 한편으로는 뚝배기에 삼계탕 덜어 넘치지 않도록 살살 달개며 끓여 상 차려 앉았고요.


 쌈장 만들어 놓은 것에 고추 찍어 맛나게 먹었고요. 먹고 난 후에 설탕과 물엿 넣고 마지막으로 팍팍 졸이고 깨 뿌리고 들기름 참기름 넣어 박박 볶아 콩자반 마무리해 치웠고요.

 그러고야 '일 없이 잘 지냅니다'

 새로 두 시 근처에, 샘에 나가 푸덕푸덕 세수하고 들어와 커피 타서 서재에 앉았습니다(그러고 보니 오늘 첫 커피였습니다).

 설거지할 때, 신음이 반쯤 섞인 깊은 한숨이 갑자기 나왔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한숨의 뿌리를 캐고자 방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나? 생각의 호미질을 했어도 캐내지 못했습니다. 참 당황스러운 일입니다.

 오늘은 밤새 담배를 한 갑밖에 안 잡았습니다.
 날 밝은지 한참입니다. 말이 길어져 이만 줄여야겠습니다.
 이때 지나기 전에 마당 한번 휘이 둘러보고 커피 한 잔 타서 다시 들어와야겠습니다.

 바람이 곱게 지나갔다니 다행입니다.

 


2023080103025목
강촌사람들-송학사
작은아버지 전화
브로콜리. 미역 줄기. 콩자반. 청정원 삼계탕. 가지 냉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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