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룡신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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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2007.07.03~2023.12.30)

천룡신을 안다.

by 바람 그리기 2020.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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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밥을 먹은 탓도 있지만, 정확하게 아홉 시 사십 분에 작정하고 자리에 들었습니다.
 자리에 들며' 내일 아침까지 깨지 않고 자겠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입니다.
 '아, 실컷 잤다'
 몸을 뒤척이며 습관처럼 머리맡의 폰을 열었습니다.
 <새로 두 시 반>
 '어휴...'
 일어날까 어쩔까? 잠시 생각하다 요강에  볼일을 보고 다시 자리에 누웠습니다.
 (더 자보자….)

 여섯 시 사십 오분, 일곱 시.
 알람이 울리는 것을 들으며 두어 번 눈을 떴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일단, 잠을 선택한 노역은 성공한 셈입니다.

 

 늦은 아점을 먹으러 부엌의 국을 냄비에 덜어 불에 올려놓고,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밥 덜어 올 컵(다른 그릇 후질르기 싫어서 커피 먹는 내 컵)을 들고 건너채를 건너가는데 삼월이가 온몸을 흔들며 반가워합니다.
 (아침밥을 안 챙겨주고 갔구나….)

 '지둘러 지지배야! 나도 안 먹었어!'


 밥을 말아 김치를 얹어 대충 우적우적 넘기고 그 빈 냄비에 돼지기름 한 TS을 뜨거운 물에 녹이고 사료를 덜으려고 허리를 숙였습니다.
 '이런...'
 사료 포대가 안 보입니다.
 '낭패네...'
 부엌문 밖에서 삼월이는 낑낑거리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마땅한 것이 없습니다. 할 수 없이 건너채로 건너가 밥 한 주걱을 말아 삼월 님께 대령했습니다. 힐끗힐끗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더니 볕이 드는 따뜻한 마당 한쪽에 여유롭게 자리를 잡고 앉습니다.
 '이년아, 오늘은 밖에 나갈 계획이 없었는데, 너 때에 글러버렸잖어!'
 속도 없이 꼬리를 살강 거리는 삼월이에게 푸념을 늘어놓고, 영등포역 노숙자 몸뚱어리에 물 구경을 시켰습니다.
 옷을 갈아입고, 장으로 나서기 전 옥상으로 올라갔습니다. 볕이 너무 아까워서요.
 (열어 놓고 나갔다가, 사료 사서 들어와 닫으면 되겠어….)

 

 '잘 뜨고 있나?'
 간장독 뚜껑을 열고 덮개를 벗겨 봤습니다.

 

 '어!'
 혹시나? 염려하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지난번 확인할 때는 이상 없어 맘을 놓고 있었는데, 간장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습니다.

 

 바람을 쐬어 주면 자연적으로 양이 줄기는 하지만, 장을 담고 볕을 쐬어 준 것이 딱 두 번이니 줄어든 양이 정상이 아닙니다. 독 아래를 살피니 분명 간장 배어 나온 흔적입니다.
'어휴... 일 났네….'

 

 어쨌건 사료는 사 와야 하고...
 장 구루마를 끌고 집을 나섰습니다.

 시장으로 가는 내내 새는 간장독을 어찌해야 하나 심란합니다.
 (어디다 어찌 옮기나... 새거나 말거나, 그냥 내버려 둬?...)

 

 마트에 간 김에 일회용 면도기도 한 묶음 샀습니다. 화장실에 굴러다니는 녹슨 일회용 면도기를 주워 쓴 것이 꽤 되었는데 일부러 사러 나가기도 귀찮고 또 나가면 잊어버리고...

 간장독 생각에 맘은 급하고, 곁도 안 보고 서둘러 돌아왔습니다. 우편함에 들어 있는 책과 고지서를 챙겨 대문으로 들어서서는 거실문을 열고 우선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 옷을 갈아입고 고무장갑을 끼고 머리카락 빠질까  모자를 쓰고 장화를 신고 수세미와 바가지를 챙겨 넣은 들통을 들고 옥상으로 올라갔습니다.

 

 '고무통에 덜까?' 생각도 했지만, 어머님이 엎어 놓고 쓰지 않고 있던 독이 생각났습니다.

 어머니께서 쓰셨고, 할머님께서 쓰셨고, 또 그 위에 할머니...께서 쓰셨던. 고단한 앞치마를 두르고 가늠할 수 없는 시간 동안 천룡신께 손을 비벼 정성을 염원했을 독.

 

 묵은 세월만큼이나 엄청 무거워서 낑낑거리며 조심조심 독을 꺼내 살피니 다행히 깨진 곳이 보이지 않습니다. 물을 받아 독을 씻고 행주로 닦아 내고 자리를 옮겨 잡고 신문지 한 장을 불을 붙여 소독했습니다.

 

 메주 두 개는 완전하게 물 위에 떠 있고, 두 개는 중간쯤 떠 있고 나머지 두 개는 아직 바닥에 가라앉아 있습니다. 장을 가르려면 아직 한 달도 더 남았으니 당연히 아직 뜨지 않은 거지요. 조심조심 옮기느라 온 신경을 곤두세웠어도 세 개가 깨졌습니다. 나머지도 손을 탔으니 이미 깨진 거나 다름없을 겁니다. 장 가를 적에 애먹을 것은 분명하지만 배부른 걱정이려니 합니다. 간장은 맛있게 익겠지요.
 독이 내 허리춤에 닿을 만큼의 크기인데, 배가 나와서 간장을 들통에 퍼 날라 모두 옮겨 넣었어도 반도 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소금물을 반 들통 더 타서 보탰습니다. 새는 간장독은, 어머님이 딱 메주 한 말 짜리 독으로 장만하셨던 듯싶은데요, 이번엔 쑨 메주는 묵은 콩을 보태느라 반말이 늘어났으니 메주양보다 소금물을 적게 넣었거든요(사실은, 네 덩이는 간장을 담아 된장 가르고 한 덩이는 빠개 장을 담고 한 덩이는 말려서 빻아 놓았다가 고추장 담글 적에 쓸 생각이었는데요, '쓰레기장 같은 장독대, 어머니 와병하신 후로는 행주 한번 손 간 적 없는 장독을 생각하니 부아도 치밀고... 헛짓거리하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어 그냥 모두 소금물에 넣었습니다).

 

 마무리하고 샘으로 내려오니 나도 모르게 인중을 끌어 올려 냄새를 맡게 되도록 온몸에서 짠내가 진동합니다. 모처럼 영등포역 노숙자 몸에 물 구경 시켰더니, 세차하자 비 오는 꼴입니다. 그렇다고 다시 물을 뿌리기엔 귀찮고... 옷만 모두 벗어 세탁기에 넣어 놓고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하고 나면 별일 아니듯 싶어도, 에구구 소리가 절로 나오도록 힘들었습니다.
 건너채로 가서 서랍을 열고 추리닝 바지를 꺼내와 다리를 집어넣는데 허벅지 근처에서 올라가지 않습니다. 방바닥에 주저앉아 살펴보니, 허리끈을 꽁꽁 옳아 묶어 놓았습니다.
 '염병!... 먼젓번에는 한쪽을 안쪽으로 반이나 들어가게 해놔서 끄집어 내느라 낑낑거리게 만들더니, 엿 먹으라는 건가...'
 부엌에서 젓가락을 하나 가져다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꼼지락거려 매듭을 풀어 입었습니다.

 사료를 사 오며 라이터 가스를 사 왔습니다.
 이놈의 라이터라는 놈이 있을 때는 주머니마다 굴러다니고 없을 때는 온 집안을 찾아도 씨가 안 보이니, 서재용으로 탁상 라이터를 하나 장만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요, 쇼핑몰을 한번 살펴봤는데 적당한 것을 못 찾겠더라고요. 피우던 담배도 끊는 마당에 찾는 이도 없는 관련 상품이니 당연하지요.
 그런데, 바깥채 신발장 위에 놓여있던 돼지가 생각났습니다. 누가 주워다 놓았는지, 오래전부터 그곳에 있었는데요, 가스를 사다 내가 쓸 생각으로 얼마 전에 챙겨뒀었어요. 그래서 마트에 간 김에 가스를 사 왔지요.

 나이 들어간다는 것. 꼰대가 되어 간다는 것.
 나에게도 피할 수 없는 일인 듯 싶습니다.
 어째 가스가 안 들어가고 자꾸 밖으로 새서 어댑터만 이것저것 바꿔가며 이상하다 생각했더니, 주딩이에 넣어야 할 가스를 똥구녕에 넣고 있었습니다. 그 상황을 인지했을 때는 너무 어이가 없어 허탈한 웃음을 지었습니다. 내게 있어 상상도 해 보지 않은 상황 앞에 당황하며 말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가스를 넣고 라이터를 켜보는데 말입니다.
 한 오십 번은 켜야 한 번 불이 붙을까 말까입니다.
 스타터 전극과 가스 분출구의 유격이 맞지 않거나 초크의 세기가 약하다는 말인데...
 손 보려면 돼지 배를 갈라야 합니다.
 수술에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고요.
 그래서 그냥 던져두기로 했습니다.
 가스를 써먹자고 라이터를 산다는 것도 웃기는 얘기고, 정말 꼰대 노릇했습니다.

 

 오늘 저녁나절에, 바늘도 안 들어가는 건너채 서랍에서 추리닝을 꺼내 입고 샘으로 가 요강을 부시며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어머니께서 아침상을 들이기 전에, 이불을 개켜 농에 넣고 방 청소를 마치던, 그게 당연한 일이라 여겼던... 우리 집 아이들에게도 어릴 때 그렇게 하게 했고, 했던 것 같은. 허물 벗듯 옷을 벗어 아무렇게나 던져 놓는 삼월이 언니 때문에 다툼도 많았던 젊은 시절. 그런 내가 지금은 그렇지 않은 모든 일상에 아무렇지 않게 되어버렸다는. 그런 내가 다 저녁에 요강을 들고나와 부시고 있다는. 내려놓는다는 것이 이런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다시 생각해도, 이번 생은 글렀다는….>

 

 팍팍 늘어가는 코로나19 지역 감염자. 이 좁은 바닥에서 며칠 만에 백 명을 돌파할까 사뭇 기대됩니다.
 발병 후 이제까지 쓰고 다니는 일회용 마스크 두 개.
 나도 이제는 우체국 앞에 줄을 서야 할 것 같습니다.


 날이 추워지는 모양입니다.
 오늘은 서재 의자에 앉으며, 의자가 한몸처럼 편하게 느껴졌습니다.
 "돈 못 버는 직업 일위가 시인"이라는데,
 "하는 일로 밥벌이가 되면 직업이고 안 되면 취미여야 한다"라고, 법륜 스님이 어느 분의 물음에 현답을 건네던데,
 한몸처럼 편하게 느껴진 내 의자에 대해 생각합니다.

 

 할 말이 많았던 하루,
 지금 내 서재에 걸린 벽시계는 아홉 시 사십사 분 이십 구초를 벗어나려 애를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도움이 없다면 의미 없는 애씀입니다.
 그렇지만 멈춰서는 순간까지 멈춰서지 않겠지요.
 사람이 뻔한 종말을 알면서도 그냥 살아가는 것처럼….

 

 


 202003122813A목

 남자의눈물/개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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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장만하려면 서둘러서 알아보고 준비해라'라고, 취업 후 출근하면서 얘기했더니 사흘 전 세대주 확인 문자가 왔다.
 "아빠가 왜 하지 않냐고 하셔서 하는 건데요..."

 

 귀띔도 없이 갑자기 온 문자에 조금 서운하기도 했지만, 자기 앞가림을 잘 해나가는 것 같아 다행스럽기도 하고.
 나는 결혼 후 분가하며 자연스럽게 이뤄졌던 일인데, 서둘러 슬하를 벗어나야 하는 요즘 현실이 야속하기도 측은하기도 하고.

 우리 아버지도 이러셨겠지?
 만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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