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지난밤에 만났던 그대를 잡고 종일을 보냈습니다.
사실, 잠에서 깨어서도 명확하지 않던 꿈의 잔상들이 반나절을 넘어서며 차츰차츰 또렷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습자지에 천천히 배어드는 물처럼, 특징지을 수 없던 꿈속의 희미한 얼굴이 차츰 그대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곳의 나는 여전히 젊고 어려, 내게 닥친 불합리에 폭풍같이 끓어올라 분노하며, 가리거나 배려 없이 나의 옳음을 주장했습니다. 장난감 가게 앞 땅바닥에 드러누워 떼를 쓰며 뒹구는 어린아이 같았습니다. 그때, 거기에 그대가 있었습니다. 그대는 그때의 순수하고 순결한 긴 머리칼 대신, 귀가 덮일 만큼 자른 머리를 단정하고 세련되게 하고 있었습니다. '까르르' 목젖이 보이도록 웃어 젖히던 명랑하고 티 없는 어린 소녀가 사라진 자리에, 살포시 다문 입으로 여유롭고 너그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성숙한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기억나지 않는 무언가에 휘말려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내 손을 살며시 잡아끌던 그대. 그 포근하던 체온…….
무엇보다, 종일을 떠나지 않던 것은 나를 바라보던 그대의 그 눈빛이었어요.
마치, 사찰의 높은 단상에서 부복한 범인의 굽은 등을 내려다보는 관세음보살 같은, 그 연민의 눈빛.
나는 아직도 천둥벌거숭이 같은 오늘을 사는 것 같고, 그대는 세월에 익어 여유롭고 편안한 다른 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대.
오래된 집 마당에 앉아, 그대의 그 연민의 눈빛을 잡고 첫 커피를 마십니다.
연민의 눈빛을 기억하는 것은 여간 쓸쓸한 일이 아닙니다.
이 쓸쓸함.
아마도 가을이 오려나 봅니다.
비가 오려는지….
바람이 꽃잎을 흔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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