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력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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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 끽연

기억력 유감

by 바람 그리기 2022.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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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 그친 오래된 집 마당.
 "공손하게 인사하는 온 곳 모르는 풀꽃"이라던 아기 손 같은 놈.

 

 곰곰 생각하니 표나지 않게 무리 지어 고개 들고 있는 모습이 어찌 이쁘던지 우체국 화단에 심겨 있는 놈을 뒷짐 지고 서서 몰래 캐왔던 기억이 되살아났습니다.
 뿌리가 어찌 옹골지게 깊게 엉켜 있던지 대궁만 자꾸 잘려서 미안했던 그 꽃입니다.
 시원치 않게 뿌리가 매달린 몇 포기를 심었는데 작년엔 뿌리가 내렸는지 어떤지, 나팔꽃 덩굴에 묻혀 모르고 지냈는데 올핸 봄을 맞는 전령으로 오래된 집 마당에 첫 꽃으로 피었습니다. 지난번 튤립 구근 심으며 땅을 헤집었어도 그 근처에서 용케 세 포기가 잎을 벌었는데요, 잎이 커가는 것을 보며 튤립에 방해될까-사실, '그냥 풀은 아닌데?' 생각하면서도- 손으로 쥐 뜯었는데도 말입니다.


 기억이 살아나니 반갑고 고맙습니다.
 꽃대가 아직 올라오지 않은 한 포기를 모종삽으로 잘 떠서, 볕이 잘 드는 쪽의 빈 화분에 옮겨 심고 들어왔습니다.
 올 한 해 잘 벌면 내년엔 장독대 아래 노지로 옮겨 심을 생각입니다.


 책 무더기에 파묻혀 있는 노트북.
 술밥 하고 돌아온 어제저녁엔 그놈을 헤집어 챙겨 방 안으로 끌고 들어갔습니다. 방 안이라기보다 방안 난방 텐트 안이라는 말이 정확합니다.
 봄이 오고 기온도 차츰 올라가니 조만간 난방 텐트를 걷어치워야겠는데요, 지난겨울엔 "드문드문 잠자는 것" 외엔 생산적 활동에 동참시킨 기억이 없어 이 차 저 차 앉은뱅이책상을 끄집고 들어가 좌정했습니다. 그래 봤자 여기저기 꼼지락거리다가 잠든 것이 전부이지만, 어깨가 불편해 중간에 몇 번 뒤척인 것을 빼고는 밤을 알토란 같이 잠에 썼습니다.


 일부러 틀어놓은 라디오.
 다섯 시와 여섯 시 사이, 박혜경이 개사해 부른 "레몬트리"를 들으며 눈을 떴습니다.
 창밖은 이미 오늘이 와 있습니다.

 

 효자손을 뻗어 형광등 불을 켜고 관짝 같은 난방 텐트 천정을 바라보며 잠시 눈을 끔뻑거리는데,

 

 경쾌한 음악에 아랑곳하지 않고 뭔가 기분이 찜찜합니다. 찜찜함을 넘어 불쾌하기까지 합니다.
 '뭐지?'
 술밥 잘 먹고 돌아와 작정하고 잘 잤는데, 이 불쾌함의 정체가 도대체 뭐지?
 술이 지나쳤던 것도 아니고, 술자리에서 논쟁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어떤 날은 잠에서 깨 떠오르는 영상을 잡고, '이게 꿈이었는지, 어제 생시에 있었던 일인지...' 헷갈리고는 하는데요.
 기억력 하나는 좋다고 자부하며 지내왔는데 이런 정도이니 요즘엔 기록되어 정리된 것이 아니면 나를 믿지 못할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기억력.
 언제부터인지 만물의 모든 의미를 애써 덜어 담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행동해 오고 있는데, 그 작위적 부정이 내리고 있는 차단의 막대가 기억의 회로 어디쯤 뒤엉켜진 듯싶습니다.
 가만 생각하니, 그게 치매인 듯도 싶고...

 날 좋습니다.
 오늘 하루도 모두 평안하시길...

 

 

 

 
 202208150641금
 박혜경-레몬트리
 출처: https://sbs150127.tistory.com/entry/플레이바에서-음원-다운로드-하는-법 [☆~ 詩와 音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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