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에서 돌아와 옷을 훌러덩 벗고 현관 문지방에 걸터앉아 담배를 먹는데,
습기 빠지라 열어두었던 신발장에 눈이 갔습니다.
상태 확인차 신발들을 꺼내보니 엉망입니다.
먼저번에 대충 솔질을 해서 넣어뒀는데도요.
그 길로 주저앉아 신발을 모두 꺼내 놓고 약을 발라 솔질 후 볕이 드는 곳에 한동안 세워 뒀습니다.
그러고는 샘에 깨벗고 앉아,
오늘 입고 나가 땀이 밴 겉옷, 속옷과 신발 깔창 꺼낸 것을 빨고 씻고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속옷을 챙겨 입느라 내 방(서재) 한쪽의 서랍을 열다가 키티양과 눈이 마주쳤는데요,
또 파업중입니다.
밤에(아니지, 아침에) 형광등을 끄며 키티 양도 함께 잠들었다가 내처 잠든 건가요?
고개를 쓰다듬어 주니 또 열심히 도리질합니다.
그러다가, 키티 양 뒤편의 색 바랜 책이 손을 잡아끌었어요.
'이상하다? 단행본도 아니고 오래된 계간지가 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책꽂이가 포화점을 넘어서서 서명해서 보내주신 수증 도서나, 제가 보관할 만큼 의미가 있는 책이 아니면 그때그때 버리거든요. 사실, 책꽂이도 제 형편을 딱히 여기신 N 선생님이 몇 해전 보내주신 건데도 형편이 이렇습니다.
책을 꺼내 찬찬히 살펴보고야, '아...'
2011년. 그러니까 첫 시집을 출간하기도 전에 일인데요, 청탁받은 시 한 편이 실려 있는 책이었어요.
당시만 해도(그렇다고 지금이 딱히 나아진 것은 아니지만) 깜냥이 안 되는 입장에서 운 좋게 청탁을 받고 글이 실렸던 문예지인데요, 책을 받고 나서 얼굴이 '훅' 달아올라 당황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수록된 작가들 면면의 이력이 최하 '이렇다 할 문학상' 한 두 개씩은 수상했거나, 문학단체의 수장이거나, (글의 경중을 떠나) 본인의 일가를 이룬 내공 있는 작가들 였거든요. 그런데 나이도 어리지, 출간 도서도 없는 저 같은 무명 삼류가 같은 지면에 글을 실었다는 것이 조금 창피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1990년에 제 등단 심사를 하셨던 '성기조' 박사님의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요.
-음, 그러고 보니 문단 이력으로만 따지면 그때 이미 등단 10년도 지난 중견 작가였으니 아주 얼토당토 한 일은 아니듯 싶네요.
후에 이 시는 두 번째 시집 『바람 그리기』에 수록했는데요-앞에 밀린 시들이 많아 첫 번째 시집에는 수록하지 못했고요- 지금 모처럼 살펴보니 "살아 있었네"라는 탄식이 나도 모르게 흘러나옵니다.
시간이 가면서, '저 때의 글에 대한 다짐과 열정이 점점 희석되고 타락했구나...'라는 자각이 절로 듭니다. 다 욕심 탓입니다. 부질없는 몸 달음 때문이기도 하고요.
"내 시가 아닌 것"을 "대중성과 소통"의 명분으로 쓰고 싣고...
흠...
반성하고 되돌아보지만, 지금 내 형편이 들물도 날물도 아닌 <정조기>인 것만은 분명한 듯싶어요.
어떡해야 이 침묵의 골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사흘 연휴가 끝났습니다.
휴가들은 다녀오셨다 모르겠어요.
'골에서 내 딛는 첫 발이 되려나' 콧구녕에 바람 좀 쐬러 며칠이라도 길 떠나고 싶은 생각을 하다가도, 엉망진창인 집안 꼴과 코로나 19 확진자의 폭발적 증가를 생각하면 또 심란해지고... 뭐 갈팡질팡 그렇습니다.
좋은 꿈 꾸시고,
개운한 새날 맞으시길 빌어요.
20200817월2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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