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고, 맞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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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2007.07.03~2023.12.30)

보내고, 맞고,

by 바람 그리기 2022.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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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엌 가스가 떨어졌다.
 두어 달 전 부엌 가스 떨어져 시킨 새것을 어머님 생전 거실 스토브에 쓰던 것과 바꿔 사용했다.
 그러니까 얼추 6년 전 시킨 가스다. 6년이나 묵은 가스로 두어 달 남짓 밥을 해 먹었으니 제법 많은 양이 남았었던 모양인데...
 이렇게 또 하나의 흔적이 오늘에서 영영 떠나갔다.
 어머님 곁에 계실 때 아낄 것 없이 따숩게 틀어드릴 것을, 생각하면 지난날이 참 병신 같다.


 밥통에 밥 떨어진 지 오래라지만 라면으로 때우는 것도 하루 이틀이다. 결국, 지난가을 아드님이 훈련 마치고 슬그머니 디밀고 간 좁쌀밥 같은 전투식량까지 먹어 치웠으니 더는 설거지 하지 않고는 배길 재간이 없다.
 잡부 다녀와 쌀부터 씻어 놓고 대든 자싯물 통. 맹맹이 콧구멍만 한 자싯물 통에 온갖 살림살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으니 이리 치우고 저리 빼며 꼼지락 거린 게 한 시간은 너끈하게 걸렸다. 비누칠한 그릇들을 헹구는 동안, 불려 놓았던 쌀을 압력솥에 안쳤다. 설거지 마무리될 시간과 밥이 지어질 시간과 허기가 바닥에 닿을 시간이 딱 들어맞지 싶다.
 '이상하다?'
 설거지가 얼추 마무리되어 가는데, 압력솥 추가 얌전하다. 이런... 가스 불이 꺼졌다. 잽싸게 불을 붙인다. 또 꺼진다. 
 '하…. x됐다. 가스 떨어졌구나! 시간이라도 일러야 가스를 시키지....'
 떨어지려면 아예 김 나기 전에 떨어졌어야지 난감하다. 얼른 들고 건너채로 가려다가, 막 퇴근해서 아드님 진지 챙기느라 꼼지락거리고 있을 삼월이 언니 생각하니, 부산 떤다는 소리라도 나올까 싶어 관두고 전기밥솥에 옮겨 담았다. 예상대로  ¼정도가 설었다. 옮겨 담은 밥에 물 두어 컵을 보태고 취사 버튼을 누른다. 경험을 통해 불가능한 일임을 뻔히 알면서도 또 기꺼이 미련 떤다.
 "틱"
 채 1분을 못 버티고 보온으로 넘어간다. 하... 밥이나 적어야 대충 먹어 치우지... 예전, 고장 난 코끼리 밥솥에 하듯 보온으로 떨어지지 않게 종이를 접어 버튼에 끼워 넣고 폰 타이머를 15분에 맞췄다. 10분쯤 지났을까? 구수름 하던 밥 누는 냄새가 점점 탄내로 변한다. 결국 더 참지 못하고 부엌으로 들어가 확인하니 밥솥에 전열은 나가고 밥은 그대로다.
 '에이 띠불! 밥솥만 해 먹은 거 같은디...'

 

미니 밥솥 맘쿡 DMC-150 5~6인용.

구매처 G9 (G마켓과 연동) / 제조국 중국. 가격 ★★★★★ / 25,440원 (배송비 무료) 배송속도 ★★★★☆ /주문 후 사흘 도착  취사 ★★★★☆ /25분 보온 ★★★☆☆ /밥 마름   종합 ★★★★☆

sbs210115.tistory.com

 작년 5월에 장만한 전기밥솥.
 전선 탄내가 난 것은 아니었으니 잘하면 퓨즈 교체하고 쓸 수 있겠다는 생각에 침침한 눈으로 꼼지락거려 분해해 살펴보니 퓨즈가 없다. 스위치 부분에 초콜릿 조각만 한 전자 기판이 하나 붙어 있는데, 필시 그곳에 달린 저항 하나가 맛이 간 모양이다. 사실이 그러면 내 손에서는 치유 불가능한 완전 사망이다. 밥통을 도로 조립하며 나 자신에 깔보는 소리를 건넨다.
 '이 개저씨야! 지금이 무슨 7~80년대도 아니고 뭔 놈에 퓨즈를 찾노?
 보온만 염두에 두고 장만했는데, 죽을 때까지 쓸 생각으로 정성으로 닦고 아꼈는데 일 저질렀다.


 가스를 시키고 압력솥에 삼발이 찜틀을 깔고 밥을 쪄냈다. 밥 떡이 훌륭하게 됐다. 일단 밥은 덜어내야 하니, 밥 탄 숯검정이 묵은 따개비처럼 달라붙은 전기밥솥 바닥을 박박 닦아 도로 퍼담아 두었다. 큰일이다. 끼니마다 레인지에 데워가며 저 많은 밥을 언제 먹어 치우나... 아무래도 하나 장만해야 할 모양이다.


 이것저것 요것.
 회주로 시작해 쐬주까지.


 간간이 밖에 나와 담배도 먹어가며 옹골차게 먹고도 다 먹지 못한 쇠곱창전골은 포장해 왔다.


 '참, 너 밥솥 고장 났다며 버렸니?'
 "39만 원 쓰여 있는데, 36만 원 쓰여있는 데가 있어서 새로 샀지. 그전 건 안 버렸고..."
 '잘 되었다. 그것 나한테 버려라. 내가 AS 받아서 쓸 테니'


 귀가하는 길에 친구 집을 들러 밥솥을 건네받고 터벅터벅 돌아오는데, 당최 얼마나 무겁던지, 숨 돌릴 겸 역사 자판기에서 제일 비싼 커피 뽑아 쭈그려 앉았다가,
 담배 사러 들린 편의점 밝은 불빛 아래에서 보니,


 I GOGOGOGO....
 집으로 돌아와 아버님 쓰시던 간이 공구 가방을 챙기고,


 추에서 김이 새며 설은 밥이 된다고 했으니, 일단 요리 궁리 조리 궁리하며 하나씩 분해해 나가는데,


 친구님,
 나름 고쳐보겠다고 푸덕거린 흔적이 보인다. ㅋㅋㅋㅋ


 요기조기 감춰 둔 나사들 찾아 분해하고,


 숨겨 둔 전선까지 끄집어 내 살펴봐도 배선은 열 먹은 곳도 안 보이고 상태가 양호하다.녹슨 곳에 방청유 뿌려 대충 닦고 다시 조립한 후 마지막으로 추 바킹을 살핀다.
 옳다 하니!


 생각대로 바킹이 닳아 두 군데가 찢어졌다.
 연성 고무이니 돼지 본드를 써야겠지만 오밤중에 구할 곳도 없고, 순간접착제로 마무리하고 말았다.


 물을 붓고 압력 취사 실험을 하는데, 칙칙칙칙 김이 쉴새 없이 빠지다가 '쿠쿠~!' 취사가 완료되긴 하던데 저게 정상인지 어떤 건지 모르겠다. 아녀도 좋고 정상이면 더 좋은 일이지만 보온 기능만 되면 되니 상관없는 일이다.
 다 좋은데, 압력추가 왜놈 관모처럼 생겨서 기분 나쁘다.


 꼼꼼하게 닦아서 밥 옮겨 담아 자리 잡아 놓고, 향 하나 사르며 "잘 맞아주십사" 조왕신께 치성드린 후 전원 짜잔!
 이제 돼지처럼 먹을 일만 남았다.
 참, 밥을 옮겨 담다가 오늘 새로 안 것.
 중국 5~6인분이 우리나라에서는 10인분이라는 것.


 밥솥을 조물딱 거리는 내내 생각했다.
 혼자 살면서 10인용을 사용했다는 것도 그렇고, 고장 난 밥솥을 왜 버리지 않았을까?
 오늘 내게서 떠나간 흔적에 친구도 닿아있는 것은 아닌지…….

 

 

 

 

 
 20220302~03
 새벽20대대선사전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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