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석(烏石)을 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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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2007.07.03~2023.12.30)

오석(烏石)을 씻다.

by 바람 그리기 2020.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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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시 무렵, 아점상에 나온 된장국.

 아무 생각 없이 고봉밥의 반을 푹 떠 국에 말아 입에 떠 넣는데,

 '하...'

 된장국 맛을 더하느라 넣은 청양고추인 줄 알았더니, 청양고추에 된장 간을 한 국이다.

 

 고추만 봐도 땀을 흘리는 사람들에 비하면, 매운 음식이라고 마다하는 식성이 아닌데도 덜렁거리는 이를 매달고 사는 요즘의 형편이니 입 안에 불이 난다. 아니 정확하자면, 뿌리 끝만 매달려 드러나 있는 송곳니에서 자각된 통증이 정수리 끝까지 번개처럼 치솟아 오른다.

'하...'

 개수대로 들고 간 국밥을 조리에 쏟아 맹물로 두언 번 헹군 후 정수기의 온수를 다시 말아 상 앞으로 돌아왔다.

 찬밥 더운밥 가리지 않고, 웬만하면 음식 남길 줄 모르며 살아왔는데...

 결국 국에 만 밥을 다 비우지 못했다.

 

 '의. 식. 주'

 사람이 살아가기 위한 세 가지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라는데, 난닝구라도 걸치고 집안에 들어앉아 청양고추국밥을 물에 헹궈 한 끼 때웠으니 룸펜의 일상이 그 정도면 되었지 싶다가도, "밥을 먹은 건지 고문을 당한 건지 불쾌한 트라우마가 되어버린 밥상머리의 시간 "을 생각하니 마음이 영 찝찝하다. 그렇게 뇌관 근처에 까지 타들어가던 울화의 감정을 다독여 준 것은, 서재 창을 넘어 들려오는 바람종 소리.

 담배를 먹으면서 종종 눈도 감으며 엉킨 마음 실타래의 끝을 바람종 소리에 얽어 놓는다.

 마치 맨발의 수도자가 갠지스 강가에 앉아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기라도 하듯...

 

 가스스토브.

 지난겨울엔 단 한 번도 불 댕겨 보지 않고 그냥 그 자리 그렇게 있는데,

 늘 마주 보고 있는 그놈의 반사경이 오염되고 때에 전 모습에 영 찝찝했다. 그래도, 앞을 막아 놓은 철망을 떼어낼 방법을 못 찾아 궁리만 한 것이 몇 해.

 그제 저녁에 어찌어찌 꼼지락 거리다 철망을 떼어냈다. 그러고는 반사경에 신문지를 덮고 분무기로 물을 뿌려 붙여 놓았다. 

 

 갠지스강의 환상에서 번쩍 눈을 뜨고 돌아와 신문지를 붙여 때를 불려 놓은 스토브를 청소하고, 서재 입구 거실 벽에 걸린 거울을 닦고, 거울 위에 걸린 부모님 액자를 닦고...

 거울을 닦으며 보인 서재 안 의자에 놓여 있는 등받이 쿠션의 커버를 벗기고.

 커버를 벗기며  생각 난 안방 난반 텐트 안의 내 베갯잇을 벗기고.

 정성을 들여 연마한 후 잘 닦아 어느 명문가 무덤 앞 비석으로 서 있는 값비싼 오석(烏石)같이 반지르르 광이 나는 베갯잇을 벗겨 들고나오는 김에, 내 빨래통에서 양말 두 켤레와 속옷 한 벌을 함께 꺼내 들고나와 마당 샘으로 가서 세재 푼 물에 담가 두어 번 조물딱 거려 놓고.

 부엌으로 돌아와 행주 빨고 석자(구멍 뚫린 국자)를 뜨거운 물에 튀겨 소독해 들고 옥상으로 올라가 간장 휘휘 저어준 후, 새 간장독 · 씨 간장독 · 새 된장독 · 묵은 된장독, 유리 덮개며 아가리며 행주로 닦아주고.

 옥상에서 내려와 화장실 들어가 용변 보고 안채로 건너와 컵라면으로 허기 달래고 담배 먹으며 서재로 들어와 컴퓨터 켜고 샘에서도 들리게 볼륨을 높여 저장된 음악 랜덤으로 재생시켜 놓고.


 플라스틱 앉은뱅이 의자에 퍼질러 앉아 빨래를 시작한다. 

 랜덤으로 재생되는 음악이 서재 창을 넘어서며 바람종 소리와 섞인다.

 

 이번 랜덤 재생의 사이클은 오늘 내 감성에 빈틈없이 들어맞는다.

 Santana의 I love you much too much로 시작한 음악이,  Sarasate의 Zigeunerweisen으로, 최희준의 하숙생으로....

 갑자기 잊고 지낸 기억이 느리게 영사되며 꼬리를 물기 시작한다.

 

 - 초하루, 보름...

   고사떡을 지어 머리에 이고 어린 손주들과 함께 가계로 오시던 어머니.

   그 지고지순의 사랑, 염원, 염려...

 - 말이 없으시던 아버지.

 - 그 사이를 잇는 이야기, 이야기....

 

 '휴...'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한숨.

 "빨래를 벅벅 한다."는 말이 이해가 간다.

 한동안 잊고 지냈는데....


 빨래를 널고 씻고 들어와 고물상처럼 책이 쌓여 있는 서재 책상을 정리한다.

 조금 머뭇거리다가, 또 한 뭉탱이 책들을 대문 밖 도로가에 내놓는다.

 모두 새 책이니 아깝기도 하고 보내준 사람들께는 미안한 일이지만, 대충 훑어보았고, 이미 포화인지 오래인 책장 탓에 보관할 방법도 없고.

 조금 머뭇거리는 동안 '책장을 더 들여놓아야 하나...'라고 중얼거리며 둘러보았지만, 서재 안에는 여분의 공간이 보이지 않는다. 거실에 더 들여놓을지 잠시 고민해보기로 했다.

 

 책들을 내놓고, 선택받은 놈은 빈 공간을 찾아 쑤셔라도 넣어 놓고 의자를 거실로 내놓고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을 한다.

 깜짝 놀랐다.

 방을 닦은 걸래가 내 베갯잇처럼 오석(烏石)으로 변하리라 예상했었는데, 깨끗하다.

 물고 있던 담뱃재를 떨어뜨리기 일수인 데다가 툭하면 머리를 벅벅 긁는데... 청소한 것이 언제인지 기억이 없으니 당연한데 방바닥을 닦은 걸래가 행주처럼 뽀얗다니. 허, 신기하도다.

 

 서재 창소를 마무리하고 이젠 거실이다.

 한 마디로 표현해서, "겁이 난다"

 삼월이 언니가 토닥거림을 멈추고 부엌문을 열고 어수선한 거실을 뚤레거린다.

 '밥상 놀라고? 바깥채에 차려'

 사돈에 팔촌에 처삼촌 묘 벌초하듯, 대충 마무리하고 샘에 가서 비눗물에 걸래 담가 놓고 진지 잡수시러 바깥채로 건너간다.

 진지 잡수시고 계시는 아드님 곁에 앉아 마른 나뭇잎 같은 미역 냉국에 한술 말아 후루룩 넘기고 건너왔다.


 

 샘 한쪽에 걸려있는 샤워기 호수.

 아버님, 어머니.

 여기서 이렇게 쪼그려 앉아 이 호수를 수도꼭지에 꼽고 씻으셨겠지.

 옹색하고 궁핍하다. 속상하다.

 

 

☆~ 후회는 너의 몫 / 성봉수 ~☆

 후회는 너의 몫 / 성봉수  나를 걸어 잠그고 나서지 않는 동안  기다려 주지 않은 시간과  돌아오지 않는 사람  내 안에 앉아  알 수 없었거나  그때는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것들  지금의 내�

blog.daum.net

 투석을 시작하신 첫해 여름.

 춥다는 어머님을 위해 내가 기껏 한 것이라고는 들통에 물을 담아 비닐을 덮어 낮동안 햇볕 아래 두었다가 드리는 것. 온수기가 있는 바깥채로 모시던지, 샘에 있는 가스레인지에서 데워드리면 될 일이었는데, 무슨 생각이었을까?

 왜 그랬을까?


 아버지 어머니께서 쪼그려 앉았던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씻는 동안 다시 꼬리를 무는 이런저런 생각들.

 

 '엄마, 무쇠로 만든 기계도 시간이 지나면 닳고 녹이 슬고 고장이 나는데 팔십 년을 쓴 엄마 몸은 어떻겠어요. 사람 살고 죽는 거야 하늘의 뜻이니, 억울해하지도 마시고 그냥 그러려니... 하고 편하게 마음먹으세요.'

 구멍 난 팬티를 버릴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더 입기로 하고 빨아 널었다. 

 

 

 

202006282627일
다크초코래뜨가떨어졌네
갑자기 캐롤이 듣고 싶은 건 또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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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코로나로 미뤄왔던 용두회 첫 모임.

변하지 않아서, 지질해도 좋은 친구들.

주제가 노후대책으로 바뀔 정도로 시간이 많이 흘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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