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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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ㅁ사랑방

이유.

by 바람 그리기 2024.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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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남자들이나 가는 거지! 차례 준비하면서 벌초까지 따라가?"
 작년, 직장 동료로부터 이제 것의 행동을 부정당한 대주 엄마는 그 말을 전하며 간을 보기는 했어도 작년까지는 함께 가서 갈퀴질을 했습니다.
 자신의 관심에 따라 개폐 여부가 달라지는 분명한 이문(耳門)을 가지고 있는 대주 엄마이니, 직장동료의 그 말이 이도(耳道)를 통과하고 입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의식 안에 자기 것으로 각인되었다는 얘기입니다.
 올해는 지지난 주 아버님 기제사 모시고 나서부터 대주에게 "불참을 통보"했노라고 흘리듯 내게 건넸습니다.
 옛날 같으면 할머니 소리 듣는 나이이니 남자도 오르기 힘든 산을 따라다니기가 벅차기도 할 겁니다.

 "외갓집은 제사 때마다 방으로도 못 들어가고 대청마루에 복닥복닥 서서 모실 정도로 남자들이 왕왕거리는디, 이놈에 성씨네는 지관들이 없어서 지사 모시는 것 같두 않어!"
 제사 모시는 날이면 어머님 생전에 늘 하시던 말씀입니다.
 그렇게 자손 번성한 집이야, 날 잡아 모두 모여 벌초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지요. 요즘에야 나 살기도 바쁜 세상이니, 모여서 벌초하기는커녕 일없이 모시던 조상 묘소도 화장해 납골당에 모시는 것이 흔한 일이이 되었고요.
 고조부터 아버님까지는 형제를 유지하던 성씨네.
 나부터 대주는 그마저도 깨지고 외동으로 대를 잇고 있으니, 그런 집에 시집온 대주 엄마는 "갈퀴질"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지내 온 세월이었는데. 그 당연했던 것이 당연하지 않았던 것이 되었단 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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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요일에 가기로 한 벌초.
 지난 두 해, 대주가 예초기를 장만해 두 대로 예초 작업을 했으니, 힘을 덜었습니다.

 

역사적인 벌초

이빨 빠진 할머니 묘소를 끝으로 올 벌초도 잘 마쳤다. 해가 갈수록 산에 오르는 것도 힘들고 예초기 메는 것도 힘들어도, "일 년에 한 번뿐"을 생각하며 나태함을 다잡으며 돌아왔다. 대주께서

sbs090607.tistory.com

 올해는 한명은 갈퀴질을 해야하니 예초기 두 대를 지고 올라갈 수 없는 일인데, 팔팔한 대주를 두고 내가 예초기를 메고 갈 수 없는 일이고...
 한 대로 하면 대주님 힘들 걱정도 되지만, 다 저녁이 되어서야 끝날 게 뻔한 일입니다.

 그래서 지난 일요일 대주님 예초기를 꺼내 정비해 놓았다가, 갈퀴질은 그날 하더라도 섭골 노할머님 산소나 미리 벌초하러 오늘 다녀왔습니다. 
 죽으로 연명하는 놈이니 최대한 에너지 소모를 줄이기 위해 예전 다니던 빠른 길을 택해 묘소로 향했는데요, 산허리를 타고 오르는 길이 여기저기 끊기고 한삼덩굴이 온통 번져 있는 데다가, 올해는 묘소 아래에 있던 복쌍나무 밭도 나무를 다 베고 공터로 그냥 방치해 풀이 허리까지 올라옵니다.
 풀밭에 감춰진 고랑으로 발을 헛디뎌 나동그라져서 진흙투성이가 되고, 풀밭을 헤치며 오르느라 묘소에 닿기도 전에 진이 다 빠져 헛구역질이 웩웩 올라왔습니다.

 이럴 줄 알고 김밥천국에 김밥 두 줄 챙겨가기를 잘했습니다. 어쨌거나 묘소에 도착해 깁밥 한 줄 우물거려 삼키고 담배 두 대 먹는 동안 컨디션 회복시켜서 예초를 시작했는데요, 법면을 깎다가 다섯 번이나 미끄러져 자빠졌습니다. 그중에  두 번은 뒹굴기까지 했습니다(대주님이 장만한 줄 날을 가지고 간 게 다행입니다). 낫으로 베어낸 아까시나무 둥치로 뒹굴어서 똥꼬에라도 박혔으면 첩첩산중에서 어떡했을지, 생각만으로도 아찔합니다.

 "아무리 죽 먹는 삭신에 허벅지 힘이 떨어졌기로 이렇게나 자빠지다니, 다 되었네 쯧쯧..."
 그런 내 모습을 자탄하며 마지막 자빠졌을 때, 기운도 빠지고 빗방울도 굵어졌고, 남은 김밥 한 줄 먹을 겸사로 예초기를 내려놓고 앉았는데요.
 "어랏! 이게 뭐랴?"

 그제야 자꾸 미끄러지고 자빠진 이유를 알았습니다.
 간간이 비도 뿌리는 날씨이니 미끄러질걸 예상하고 누님이 주신 메이커 등산화를 챙겨 신고 갔습니다.
 자꾸 자빠지면서 그 점이 의문스럽기는 했는데요,
 왼발은 밑창이 통째로 사라졌고요.

 오른발은 스파이크 부분이 기가 막히게 떨어져 사라졌습니다.

 "염병, 어쩐지..."
 그냥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작업 마치고 내려서는데 법면 아래에 떨어져 나간 오른발 스파이크가 보입니다.

 찾아보면 왼쪽도 어딘가에 있을 텐데, 주워서 순간접착제로 붙일까?
 0.1초 생각했다가 그냥 폐기하기로 하고 지나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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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낑낑거리고 묘소로 오르다 진탕에 뒹굴고 나서, 헛구역질하며 잠시 앉았을 때 생각했습니다.
 "아버지, 어머님과 함께 지극정성으로 가꾸시더니 운명하시기 10년 전쯤부터는 무릎관절로 고생하시며 아예 선산 근처에도 못 가셨으니... 내게도 올 그날 전에 다닐 수 있을 때 감사한 마음으로 뵈러 다녀야지..."

 

 
 202408272736화귀또리소리에턱을괴고.
 김태곤-송학사_이치형통키타2023
 복쌍밭 논네,노할머니 산소 앞 울타리 설치

 가을이 다가오니 여기저기 청탁은 들어오는데,
 기워 놓은 건 하나도 없고, 깁기도 싫고...

 -by, ⓒ 霧刻窟 浪人 성봉수 詩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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