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잘 수 있는 사람.
본문 바로가기
낙서/┗(2007.07.03~2023.12.30)

잠잘 수 있는 사람.

by 바람 그리기 2021. 12. 28.
반응형

 

 그가 짐작하는 몇 가지 기억 중 하나를 떠올리시며  어느 해인가 어머님께서는 몹시 분해하셨는데, 어제저녁 무렵 압력솥에 딸랑이가 울리기를 기다리는 동안 밀린 설거지를 하고 섰던 그에게 예고도 없이 그런 분함이 몰려들었던 거다. 그 분함의 정체는 지난 시간에 대한 기억의 단편들이 열을 지어 떠오르다가,  열은 어느 순간 엉망진창으로 베베 꼬여 뒤죽박죽 되어버렸는데 그것은 그가 걸어온 여태의 진심이 부정의 매듭으로 엮여져버린 것이었다.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진심은 왜곡되고 묵언의 신뢰가 왜곡의 칼날에 사정없이 잘려 나간 오늘 앞에 서서 분해한 것이었다. 그를 더 분하게 한 것은 그 분함에 대해 어떤 항변도 통하지 않도록 시간은 결코 되돌릴 수 없이 그만의 몫으로 남겨져 있고, 그의 부정할 수 없는 지난 시간에 대한 진심과 돌개바람에 쓸려간 낙엽처럼 보잘것없이 왜곡되어버린 오늘의 관계 앞에 무력하게 손 놓고 있을 수 밖에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고무장갑을 벗어던지고 술 한잔하면 딱 좋았을 분함을 코로나 3차 접종으로 지지근 하게 시작된 미열과 두통과 근육통이 막아섰다. 몇 번 긴 숨을 내쉰 그는 습관처럼 서재 책상 앞에 앉아 먼저 담배를 한 대 먹었지만 그 후론 다른 어떤 것을 생각하거나 담아둘 수 없이 그저 멍하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눈을 떴다. 아침이다.
 몇 번을 뒤척인듯싶어도 새로 한 시 무렵 자리에 누워 죽은 듯이 밤을 지우고 맞은 아침이다. 전날의 분함에 대한 무력감은 쓸려가다 만 고운 모래처럼 가슴 깊은 곳에 낮고 얇게 가라앉았고, 그 위로 오늘의 평상이 햇살로 부서지는 잔잔한 물결로 흐르고 있었다. 그는 어제보다 조금 더 축이 난 몸을 자각하며 밤새 시간을 지운 놈의 정체가 그 스스로였는지 코로나바이러스였는지 잠시 생각했다. 시간의 대오 같은 삼장이 미혹한 제천대성(齊天大聖) 같은 그의 분함에 죽비의 호통 같은 긴고아(緊箍兒)라도 씌웠을까? 머리가 아프다. 찬물에 타이레놀 한 알을 삼키며 추스르고 앉아 담배를 물었다.


 이유가 어디 있건, 무엇이 그리했건, 잤다. 신기하게도 초저녁부터 아침까지 죽은 듯 잠잤다.
 그는 그 신통한 숙면에 대해 번뜩 생각한다. '그래, 나도 잠잘 수 있는 사람이다'
 무엇이 어디서 어떻게 꼬여 무너진 신뢰에 분해하건 말건 그냥 잠잘 수 있는 사람이다.
 그처럼 그녀처럼 그들처럼 그냥 잠잘 수 있는 사람으로 그 분함 또한 유별난 것 없이 때 되면 편하게 누워 드는 잠과 다를 것 없는 일이다.

 

 

 

 
 이용/잠들지 않는 시간

 

 

반응형

'낙서 > ┗(2007.07.03~2023.12.30)'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할머니 기일.  (0) 2021.12.31
무덤의 핑계.  (0) 2021.12.30
2021 크리스마스.  (0) 2021.12.27
회중시계를 팔다.  (0) 2021.12.25
이 밤에 그 밤을 생각하다  (0) 2021.12.21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