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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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2007.07.03~2023.12.30)

칼질하다.

by 바람 그리기 2022.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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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이 참 좋았습니다.
 예보에는 한여름 기온이라 하더이다.
 그래서인지 오후 무렵 시원한 생맥주 한 잔이 먹고 싶어졌습니다.
 짧은 창자 때문에 맥주는 어차피 딱 한 잔이면 족할 테니 쐬주 안주 닭똥집을 시켰고요.

 

 오랜만입니다.
 기름장에 찍어 먹는 미각이 참 좋습디다.

 소주를 반병 비우고 담배를 먹으러 점포 앞에 나섰다가, 무심코 근처에 있는 옛사람의 흔적에 눈이 갔습니다.
 '그래, 어찌 지내시나?'
 남은 소주를 먹고 그곳으로 향했습니다.

 과수원을 하시던 형의 아버님은 화훼와 분재에 일가견이 있었고, 어머니는 그 당시 제법 규모가 있는 한식당을 오래 했습니다. 두 분의 피를 물려받은 형은 지역을 대표하던 "시인"이자 성공한 사업가였습니다. 그런 형이 운영하던 이 레스토랑은 한때 피아노 연주자가 있을 정도로 사람들이 북적이던 명소였습니다.
 텅 빈 업장.
 허리 숙여 인사하는 나를 형수께서 몰라봅니다.
 이제는 별도 직원 없이 따님과 운영하는 듯싶습니다. 형 장례식 운구 때 관에 매달려 몹시 울던 그 따님입니다.

 착한 가격의 돈가스와 맥주를 시켰습니다.
 런천 매트를 대신해 형의 마지막 시집 낱장이 깔렸습니다.

 

 명색이 시인이니 혹시 기분 나쁠까? 형수님이 조심스레 건넵니다.
 "워낙 시집이 많이 남아서요..."
 읽지 않는 사람에겐 냄비 받침에 불과한 책.
 그래도 형의 흔적을 마주하면서는 전혀 냄비 받침과 대비되지 않고 멋스럽더군요.

 첫 시집을 발간하던 무렵의 시는 참 좋았는데요, 시간이 갈수록 존재의 근원에 집착하는 무거운 시를 쓰셨습니다. 아마도, 형의 본가 근처가 그 당시 공동묘지에 둘러싸여 있었으니 그 성장 과정의 감성 탓이 컸을 거라고 혼자 짐작하고는 했습니다. 같은 늙은 시이면서도 나 뭐시기처럼 말장난하지 않고 그렇게 끝까지 품격을 놓지 않고 시인으로 살고 가셨는데요, 그 탓으로 본인의 역량에 비해 대중적 인지도가 떨어지는 한계를 넘지 못하셨습니다.

 한때,
 총대 메고 칼잡이 노릇을 했던 나.
 문단 경력이나 나이나 새까만 후배였던 내가 형을 마주하고 모진 소리를 했었습니다.
 그리고 상황은 내가 맘먹은 대로 진행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존경받는 문인으로 삶을 정리할 기회"를 만들어 드린 듯도 싶고,
 한편으로는 "모진 소리까지 해가며 만든 지금이 그때보다 무슨 큰 발전이 있나? 뭐가 변했나?" 싶기도 하고,
 내가 그냥 이렇게 가만히 있는 게 맞는 건가? 라는 생각에 얼굴이 달아오르기도 했습니다.
 잠시 흥분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아이고, 나 혼자 서 있기도 힘 부친다. 옛 얼굴 붙잡고 부질없이 혼자 버럭하지 말자. 청탁 온 곳에 원고 못 보내는 게 반년이여. 시 한 편이라도 제대로 쓸 생각이나 하시게...'
 그렇게 나무라며 비틀비틀 털고 일어섰습니다.

 

★~詩와 音樂~★ [ 시집 『너의 끈』] 얼굴 / 성봉수

 얼굴 / 성봉수  동심원의 물결이 일어  햇살을 깨우고 새들을 모으고  바람을 불러 신록을 꿈꾸게 하였더니  그때 던져진 돌맹이 하나  그리움의 기억 끝에 대롱이는  쓸쓸한 추가 되었다

sbs150127.tistory.com

 고운 향은 오래오래 기억되는 법이지요.
 사람 없는 썰렁한 업장이었어도, 나지막이 틀어 놓은 음악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냥 트로트 뽕짝을 잔잔한 연주곡으로 편곡한 곡이었는데요, 어느 클래식 명곡보다 기품있게 와 닿았습니다.
 시인이 평생 다듬던 그 공간.
 형의 향기가 아직도 배어 나오고 있기 때문인 듯했습니다.

 

 

 

 목탁

        장시종

 지붕 위로 뻗은 감나무에서 감 빠지는 소리가 밤이면 "쿵"하고 들린다
 꼭 도깨비가 장난을 하는 듯 어둠이 우거진 뒷뜰로 감이 굴러 떨어진다
 처마가 낮은 지붕을 두드리는 여백의 목탁소리가 나를 깨운다
 한밤의 정수리에 떨어지는 고독한 중력의 무게

 

 

 

 

 
 202204122418화
 칼 잡이가 혼자 칼질하다 혼자 버럭 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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