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아버지께서 관공서가 모여 있는 시내 동네로 분가하시며 장만하신 일본 적산 가옥.
정 남향의 마루에서 마당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넓은 화단에는 지나는 이가 구경올 정도로 사계절 온갖 화초가 가득했는데, 색색의 장미 나무 아래서 그 향기에 취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분명 장미 꽃대 위로 하늘이 보였으니, 내가 장미 아래 파묻힐 정도로 어린아이 때의 기억인 건지 그 무렵의 장미들이 키가 컸던 건지는 확실치 않다.
그 집에 막내 이모께서 다니러 오셨는데 위로 두 큰 누님들과는 연배가 비슷하니 잘해야 스물을 갓 넘겼을 무렵인 거 같다. 그때 이모께서 부엌을 둘러보다 빨간 고무 대야 설거지통에 낀 때를 보고 기겁하고는,
"아니, 엄마가 돈 벌러 나가 집일에 신경 못 써도 도대체 여자가 몇 명인데 설거지통에 때가 이렇게 끼도록 내버려 두니? 이런 데서 그릇 씻어서 밥 먹을 생각이 나니? 아이고 구역질 나!"
이모께서 팔을 걷어붙이고 씩씩거리며 때를 깨끗하게 닦아 놓고 돌아가셨고, 그 말을 전해 들은 어머니께서는 그저 빙긋 웃으셨다.
'설거지 때마다 닦으면 깨끗할 걸, 도대체 개수대에 때가 왜 끼지? 보이는 곳이 이 정도면 안 보이는 곳은 도대체...'
설거지통에 때가 낀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던 나. 마찬가지로 그릇 굽에 때가 낀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나.
그런 내가 개수대 안에 설거지통으로 쓰는 플라스틱 볼에 때가 꼬질꼬질 꼈다.
얼마 전, 산더미처럼 그릇을 쌓아놓고 일주일인가를 담가두었더니 그 후로 그리되었다. 오래 낀 때가 아니니 닦으면 지지 싶었는데 며칠을 닦아도 아니올시다다. 세제 푼 뜨거운 물을 하루 동안 받아 놓았다가 닦아봐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철 수세미로 문지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제 또 한 사나흘 만에 설거지를 했다. 그릇은 대충 물로 부셔 쓰면 되는데, 아이스크림 일회용 수저까지 다 썼으니 손꾸락으로 떠먹을 수도 없고 더 미룰 여유가 없다.
깨끗하게 설거지를 마쳐도, 지워지지 않는 볼에 낀 때 때문에 찝찝하다. 집어던지고 천냥마트에서 하나 장만해야 하나 어쩌나... 어머니, 세미나 다니시며 얻어다 놓은 볼이 많이 있을듯싶은데...
'눈에 보이지 않으면 아무 일 아닌데, 이 놈에 눈은 어찌 이리 잘 보이는지...'
아침.
유폐의 내게 SNS로 보내온 시인님과 작가님의 봄소식.
답신의 우표를 붙이지 않는 내가 미안하다.
오래된집 마당의 화단에 쌓인 앵두꽃잎,
부치지 못한 편지라 해둔다.
202204112618월
이제하-모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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