몹쓸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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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2007.07.03~2023.12.30)

몹쓸 눈

by 바람 그리기 2022.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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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아버지께서 관공서가 모여 있는 시내 동네로 분가하시며 장만하신 일본 적산 가옥.
 정 남향의 마루에서 마당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넓은 화단에는 지나는 이가 구경올 정도로 사계절 온갖 화초가 가득했는데, 색색의 장미 나무 아래서 그 향기에 취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분명 장미 꽃대 위로 하늘이 보였으니, 내가 장미 아래 파묻힐 정도로 어린아이 때의 기억인 건지 그 무렵의 장미들이 키가 컸던 건지는 확실치 않다.

 그 집에 막내 이모께서 다니러 오셨는데 위로 두 큰 누님들과는 연배가 비슷하니 잘해야 스물을 갓 넘겼을 무렵인 거 같다. 그때 이모께서 부엌을 둘러보다 빨간 고무 대야 설거지통에 낀 때를 보고 기겁하고는,
 "아니, 엄마가 돈 벌러 나가 집일에 신경 못 써도 도대체 여자가 몇 명인데 설거지통에 때가 이렇게 끼도록 내버려 두니? 이런 데서 그릇 씻어서 밥 먹을 생각이 나니? 아이고 구역질 나!"
 이모께서 팔을 걷어붙이고 씩씩거리며 때를 깨끗하게 닦아 놓고 돌아가셨고, 그 말을 전해 들은 어머니께서는 그저 빙긋 웃으셨다.

 

 

 '설거지 때마다 닦으면 깨끗할 걸, 도대체 개수대에 때가 왜 끼지? 보이는 곳이 이 정도면 안 보이는 곳은 도대체...'
 설거지통에 때가 낀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던 나. 마찬가지로 그릇 굽에 때가 낀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나.
 그런 내가 개수대 안에 설거지통으로 쓰는 플라스틱 볼에 때가 꼬질꼬질 꼈다.
 얼마 전, 산더미처럼 그릇을 쌓아놓고 일주일인가를 담가두었더니 그 후로 그리되었다. 오래 낀 때가 아니니 닦으면 지지 싶었는데 며칠을 닦아도 아니올시다다. 세제 푼 뜨거운 물을 하루 동안 받아 놓았다가 닦아봐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철 수세미로 문지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제 또 한 사나흘 만에 설거지를 했다. 그릇은 대충 물로 부셔 쓰면 되는데, 아이스크림 일회용 수저까지 다 썼으니 손꾸락으로 떠먹을 수도 없고 더 미룰 여유가 없다.
 깨끗하게 설거지를 마쳐도, 지워지지 않는 볼에 낀 때 때문에 찝찝하다. 집어던지고 천냥마트에서 하나 장만해야 하나 어쩌나... 어머니, 세미나 다니시며 얻어다 놓은 볼이 많이 있을듯싶은데...

 

 '눈에 보이지 않으면 아무 일 아닌데, 이 놈에 눈은 어찌 이리 잘 보이는지...'

 

★~詩와 音樂~★ [시집 『바람 그리기』] 접시 굽 / 성봉수

 접시 굽 / 성봉수  해거름의 설거지  그릇의 굽마다 때가 절었다  생각하니 나고 죽는 한 생이  접시에 담긴 물보다 나을 게 없는데  별것도 아닌 것을 담아내면서  야금야금 욕심의 더께만

sbs150127.tistory.com


 아침.
 유폐의 내게 SNS로 보내온 시인님과 작가님의 봄소식.

 

 답신의 우표를 붙이지 않는 내가 미안하다.

 

 오래된집 마당의 화단에 쌓인 앵두꽃잎,

 

 부치지 못한 편지라 해둔다.

 

 

 

 
 202204112618월
 이제하-모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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