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잡부다 / 성봉수
나는 잡부다
없다고 크게 불편한 것 없고 있어도 그다지 살가울 일 없는 그저 그런 막일꾼이다.
"왜"는 있어도 안 되고 "이렇게"는 상상해서도 안 되는 영혼 없는 막일꾼이다.
이날 나는 청주 사창동 옛 삼성 서비스센터 뒷길 어디로 부속처럼 실려 갔는데, 이상하리만큼 이 골목이 낯설지 않다. 무엇으로 하여 그러한지 기억의 문 안을 엿볼 틈도 없이 서둘러 공구를 건네고 망치를 물어 나르며 충실한 개처럼 꼬리를 흔든다. 그냥 그뿐이었으면 다를 것 없던 오후, 낡은 가구에 숨은 녹슨 못에 손을 찔려 체기의 비방 같은 빨간 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피가 떨어진 먼지 구덩이에서 포로롱 연기가 솟아오르며 기억의 램프 안에 갇힌 그날의 사내가 세상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사내는, 멈칫하는 내 갈비뼈를 우악스럽게 쩌억 벌려 심장을 꺼내 보란 듯이 들이민다. 망각의 밖으로 끌려 나온 푸른 핏줄이 잡역부의 코앞에서 팔딱거리고 있다. 그 순간 해리(解離)의 담장이 와르르 무너지며 얼굴이 '훅' 달아오른다.
청주 사창동 시계탑 근처, 차 댈 곳이 마땅치 않았던 옛 삼성서비스센터 뒷길 골목으로 부속처럼 실려 간 이날. 나는 선택적으로 상실한 기억의 램프 주둥이로 들어서고 있었던 게다.
그때 허드렛물로라도
그 길에 잠시 고였던 나를 깨운
그날의 사내여,
나는 지금 잡부란다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줄,
그때는 몰랐던 지금 나는
늙은 개잡부란다
202210월마지막날월잡고 202211032647목초고 202211070408월재고옮김.
▣ 季刊 『白樹文學』 2022 겨울 통권 101호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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