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여 나가던 날 /범수 아저씨/ 바람 그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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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2007.07.03~2023.12.30)

☆~ 상여 나가던 날 /범수 아저씨/ 바람 그리기 ~☆

by 바람 그리기 2019.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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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가.
 집성촌이니 집안이 번성합니다.
 번성한 만큼, 긴 손가락 짧은 손가락 여러 손가락이 존재합니다.

 시내에 있는 집에서 한 시간 남짓 걸으면 도착하는 외가.
 어린 제가 외가에 놀러 갈 때마다,
 어머님의 당숙께서는 늘 놀리셨습니다.

 "깜둥이 왔냐? 어디, 고추 좀 한번 보자. 고추는 얼마나 검은가!"
 서글서글한 눈망울에 깊은 주름이 패었던 할아버지.
 입에서는 늘 술 냄새가 났고, 나보다 더 검으면서 검둥이라 놀리는 것이 영 못마땅했습니다.
 얘기의 끝은,
 "니 외할아버지 춤추는 것은 네 놈 낳았다는 기별 들었을 때 처음 보고 못 봤다 이놈아!"라며 마무리 지었습니다.
 집사처럼, 문중의 험한 일 대소사를 모두 챙기셨던 할아버지.
 결국, 좋아하던 술 때문에 일찍 세상을 뜨신 것이 30여 년쯤 된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30여 년 전이면 지금의 내 나이쯤 되셨을 텐데 너무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 떠나시기 전 보름 남짓 계셨던 요양병원.
 그 병원의 같은 병실 마주 보는 침대에 당숙모께서 계셨습니다.
 그 몇 달 전에는 입원 소식을 뒤늦게 듣고 투석 마치신 어머님을 모시고 문병을 하러 갔었습니다.


 대전 병원에서 퇴원해 주말을 집에서 보내시고 월요일에 투석 모시고 나섰다가 그길로 요양병원에 입원하신 어머니.
 갈비뼈 골절로 기동을 못 하시는데 투석은 받아야 하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엄마, 따뜻해지는 봄까지만 여기 계시다가 허리 다 나으시면 집으로 모실게요'


 형편상 어쩔 수 없는 최고의 선택이었고 어머님께 미리 말씀을 드리고 모신 요양병원이었지만, 그곳에 입원하시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시지 못하였습니다
 두 눈을 꼭 감고 사람들을 쳐다보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힘들어하실 때, 당숙모가 같은 병실에 계신다는 것이 심리적으로 큰 위안이 되셨습니다.
 인사를 핑계로, 하루 두 번씩은 어머님을 일으켜 안고 맞은편 침상까지 걸어가는 운동을 시켜 드렸습니다.


 어머님 돌아가시고,
 한번 찾아 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걸음을 떼지 못했습니다.
 그쪽으로는 고개를 돌리기도 싫었습니다. 지금도 크게 나아진 것은 아니고요.
 그러더니 결국 다시는 뵙지 못하고 돌아가셨네요.

 사람 좋고 술 좋아하는 할아버지 대신, 4남매 걷어 먹이고 키우느라 고생 많이 하셨는데….
 또 한세월이 먼지가 되어 사라져 갔습니다.

 "아가, 엄마 죽으면 꽃상여 태워 줄 껴?"
 그 언젠가 아주 어렸을 적에 무릎을 베고 누운 제게 어머님이 물으셨습니다.
 '그럼 엄마. 꼭 태워드릴게요'
 상여로 운구하는 것이 흔하던 시절이긴 했지만 "하얀 꽃 상여"를 태워달라고 하셨습니다.

 오랜만에 상여 운구의 뒤를 따르자니, 어머님께 했던 지키지 못한 약속이 떠올랐습니다.
 (상여는 고사하고, 남들 다 타는 고급 장의차도 못 태워드리고 봉고차 뒤 칸에 짐짝처럼 마지막을 모셨으니….)
 선산 입구의 외통 길에 있는 민가를 지나쳐야 하니 어쩔 수 없긴 했지만, 별의별 노여운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아버지 살아계실 때는 아쉬운 소리 해가며 간이라도 빼 줄 것처럼 알랑방귀를 뀌더니, 몹쓸 사람들….)


 어릴 적엔, 남의 집 마당일 쫓아 다니고 추수를 마치고는 들로 나락을 주우러 다니던 아저씨들.
 어려웠던 세월을 바지런하게 사시더니 지금은 엔지니어가 되어 일가를 이루고 부러울 것 없이 넉넉한 형편입니다.
 <아들이 하나면 쳐다도 안 보고, 둘이면 "누가 오나"하고 고개를 들고 셋이면 "벌떡 일어나 내려다본다>라던,
 산신령에 관한 어머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먹물이니 와이셔츠니 뭐라 뭐라 해도, 어머니 꽃 가마 태워 모신다는 약속을 지킨 아저씨들이 잘난 사람들이네!'


 멀리 산꼭대기에서 산신령이 내려보고 있었습니다.




범수아저씨할머니20190126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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