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하신 개 녀, 삼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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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2007.07.03~2023.12.30)

귀하신 개 녀, 삼월이.

by 바람 그리기 2021.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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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부 반 대가리를 깔끔하게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완연한 봄날이다.
 장화를 끌며 역 광장을 가로지르다 봄볕 아래의 평화로운 정적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흡연 구역 돌의자에 앉았다.

 

 기차가 들어오고 하나둘 광장을 가로지르는 사람들.
 예전의 나처럼 반 팔 옷을 입은 성급한 젊은이도 보이고...

 


 집으로 돌아와 장화를 바꿔 신는데 역시, 슬리퍼가 한쪽뿐.
 꾸지람을 주려고 삼월이에게 다가서다가 문득,
 '아차, 고시 공부하는 셋째에게서 반찬 싸 들고 오라는 호출받고 삼월이 언니가 어제 집 떠났지!'
 내가 아침에 나가며 챙겨주지 않았으니 쫄쫄 굶었겠다는 생각이 앞선다.
 사료를 챙겨 주니 코만 벌렁거리고 외면한다.
 손으로 잡아 대령하니 그제야 오도독오도독 맛있게 잡수신다.

 

 헐~~~


 셋째 집에 있을 때는 겨우내 사랑채 안에 수시로 끌고 들어가더니,
 우울증에 걸린 건지 늙어서 만사가 귀찮은 건지 우리에서 통 나올 생각을 않는다.
 지뢰를 심어 놓는 것(꼭 대문 들어서는 골목 여기저기에)을 보면 신체활동은 이상 없는 것 같은데...


 볕이 너무 아까워 올해 들어 처음으로 마당의 샘에 앉아 서재 창밖에서 울어대는 바람종 소리를 들으며 밀린 속옷과 양말 빨래를 했다.
 빠는 김에 작년 가을 이후 한 번도 빨지 않은 잡부 복도 빨았다.
 아무리 개잡부이지만, 행색이 요즘 보기 드문 "원조 그지"와 똑 닮아 섶마다 때가 반들거리니 까다로운 오야가 뒤통수에 욕 꽤나 했을 성싶다.
 날이 따뜻하니 빨래가 아니라도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으로 게재에...


 사랑채 화장실 세탁기에 빨래를 넣고 헹굼과 탈수를 시키는 동안 노숙인에게 물 구경을 시키는데 문득 떠오른 기억,
 어린 세 공주님을 일렬로 세워 놓고 샤워기로 물을 뿌리고,
 '우향 웃! 앞에 사람 등을 닦아 준다 실시!'
 '다시 뒤로 돌았! 앞에 사람 등을 닦아 준다 실시!'
 사정없이 뿌리는 샤워기 물줄기 속에서,
 웃음 반, 당황스러움 반의 표정이었던 첫째.
 입을 함박 만하게 벌리며 깔깔거리던 둘째.
 "이게 뭔 상황이랴?"는 표정으로 의뭉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셋째.
 ㅎㅎㅎ
 "애들 씻기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아느냐"라던 당시의 전업주부 삼월이 언니를 대신했던 일이었는데,
 아이들이 어른이 되고 나는 기억 속에서나 살갑던 아이들을 이렇게 만나고...
 세월 참 얼마나 더 빠르게 지나가련지.


 점심으로 시켜 준 볶음밥(오랜만이다)
 기름이 주는 포만감은 역시 배반하지 않는다.
 11시가 다 되어 된장국에 저녁 챙겨 먹고,
 또 거실에 개처럼 쓰러져 잠이 들었다.

 

 

 

 

 

 20210313토

 

인연도 깨어 있는 이의 몫.

 정리되지 않은 화단.  손 가지 않은 겨울의 외면도 아랑곳없이  돋아난 새순.  새순이 무엇인지 정확지 않아도 "수선화"인듯싶다.  잡부 일당 나간 곳 한편의 남향 화단에 돋은

sbs210115.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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