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부 다녀와 미뤄 두었던 속옷과 양말 설 오기 전에 빨아 널며 용산역 노숙인 냄새가 절은 몸에 모처럼 물 구경 시키고 이것 저것 꼼지락거리다 식모커피 한잔 타 서재로 들어와 종일 종종거린 몸을 기지개 켜는데 때맞춰 기다린 듯 걸려온 전화를 받고 나가 술밥 먹고 돌아와 안방 매트에 전원 올려놓고 서재 형광등도 제빛을 찾으라 미리 켜 놓고 낮에 빨아 넌 베개 커버를 완전히 말려 챙겨 들어갈 생각으로 거실 바닥에 깔아 놓고 티브이 앞에 앉았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가 깨기를 밤새 반복하다가 새벽 무렵 안방 전열기 끄러 들어갔다가 이불 위에 엎어져 한 10분 또 누워있다가 다시 거실로 나와 엎어져 있다가 배춧국에 밥 말아 조금은 과한듯싶은 아침을 챙겨 먹고 담배 먹으며 기웃하게 앉았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가 깨기를 반복하다….
잠 귀신이 쓰였나 보다.
졸면 죽는다는데, 졸려서 정신을 차릴 수 없다. 그렇게 종일 자고 또 잤다. 삼월이 언니의 "팔자 편한 인간…."이라는 두런거림이 들려오건 말건 대책 없이 졸렸다. 체력적으로 잠이 리셋될 시점을 맞은 듯도 싶은데 어쨌건 대책 없이 졸려 자고 또 자고.
그리고 꿈속에서 계속 마주한 할아버님.
헤아려보니,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이었으니 섭골 본가를 정리하고 시내 큰아들 집으로 합치신 것이 예순을 막 넘기신 무렵이다. 요즘으로야 청년의 나이인데 그때는 왜 그렇게 연세가 드셨다고 생각했을까? 그 기억의 훨씬 전부터 단장을 짚고 계시던 할아버님.
" '애비는 지 애미를 똑 닮아서 사람이 너그럽지 못하고 속이 좁다'라며 어머님을 달래주셨다고, '세상에 둘도 없는 호인이셨다' "라던 어머님 말씀의 기억. 입에 단내를 폴폴 풍기시며 단장(短杖)의 굽은 손잡이를 내 목에 걸고 잡아당기시는 것으로 어린 손자의 방문을 반가워하시던 섭골 바깥채 마당의 기억. "봉수야, 뒤꼍에 까치 얼어 죽었다 어여 나와 봐라" 할아버지 거짓말에 속아 뒤꼍으로 달려가던 일본식 옛집에서의 눈 내리던 날의 몇 차례 기억. 지금의 서재인 이 방문 밖으로 흘러나오던 "할머님께 호통치시던 쩌렁쩌렁 한목소리"의 기억. 돌아가시던 그해 그 여름 그 주의 일요일에 거실에서 피아노를 뎅강 거리며 온종일 불렀던 예지몽 같던 철 없던 노래 "사의 찬미". 저녁 통근차에서 내려 멀리 집이 보이는 모퉁이를 돌아섰을 때 집 근처를 밝히고 있는 환한 불빛에서 몰려오던 막연한 불안감. 그리고 지금의 안방 문을 열었을 때 담담하게 홀로 앉아 계신 할머님. 행여 놀랄라 막아서시는 할머님의 염려를 밀치고 병풍 뒤로 들어가 마주한 주검. 할아버지를 부르며 쓰다듬던 그 백옥같이 창백한 얼굴에서 느껴지던 섬뜩한 냉기…….
어제 타 놓고 입도 대지 않았던 식모커피 버리고 다시 타서 서재에 앉았는데
해는 벌써 서쪽으로 기울어 남은 오늘을 비껴 베는 칼날을 휘두르고 있다.
던 배춧국에 밥 말아 가스레인지 위에 데우며 서 있는 동안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온 배 호의 "황금의 눈".
첫 주제음만 중얼거렸지 전곡을 신경 써 들어본 적도 없고 불러본 적이 없던 노래. 노래 제목도 오늘에서야 알았으니 내가 세 살 때 발표된 노래라는 것도 오늘에야 알았고 영화의 주제곡이었다는 것도 오늘 알았다.
결국, 남겨진 이의 기억으로 모든 것은 의미가 되는...
202102091924화
배호 / 황금의 눈(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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