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를 보고 걷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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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ㅁ안방

뒤를 보고 걷는 남자

by 바람 그리기 2024. 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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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부 다녀와 질러온 황·적 장미 가지 손질해 발근 촉진제 희석한 물에 담가 놓고.
 옥상과 화단에 푸성귀와 토란에 물 주고.
 조각볕 먹고 늦게야 오신 방울처럼 달린 불두화꽃 앞에 한동안 서서 이런저런 생각.

 -↘만개할 무렵이면 가지가 척, 척 휘던 마치 거대한 꽃다발이었던 나무. 그 다닥다닥 늘어진 꽃 방울 사이에 산란하던 따스한 봄볕으로 각인된 섭골 할머님 댁의 좋은 기억. ↘이웃과 맞닿은 우리 집 일본식 나무울과 장독대 사이에서 노 씨 아줌마와 담소하는 엄마의 국방색 월남치마에 매달려 까치발로 따먹던 달콤한 앵두와 잎마다 달려 있던 쐐기에 쏘인 쓰라린 통증. 그리고 짙푸른 앵두 잎과 풀 한 줌 없는 앵두나무 아래의 황폐함 사이에 서서 느끼던 풍요와 빈곤에 대한 그 시절 어린 나의 정체불명의 복잡한 감정의 기억. ↘마루를 내려서 마당을 건너 화단 안에 서면, 농대에 다니던 막대 외삼촌이 화단 가득 심은 색색의 장미에서 풍기던 그 매콤하고 신비롭던 향기(그런데 이상하게도 성인이 된 후 느낀 장미 향수는 별로다. 코가 맵도록 너무 인위적이고 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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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은 땅에 서 솟은 네가 어쩌면 이리도 순백이니?'
 불두화나무는 조각볕 드는 마당 탓에 바깥채 지붕 위까지 키만 크니 해마다 잘라내기 바빠 풍성한 꽃다발을 보는 일은 언감생심이고. 마찬가지인 앵두나무는 가지 아래에 한해살이 꽃이라도 보려는 욕심에 볕을 나눠주려 몽당 비처럼 가지를 잘라 내고. 어느 해 비싼 돈 들여 장에서 사다 심은 장미 두 주는, 어머님 계시는 몇 해 꽃을 피우고 가지를 벌다가 어머님 여의고 만사에 손 놓은 몇 해 겨울을 못 버티고 사라졌고...
 
 '세상에 나온 지 한 갑자나 지난 사람이 아직도 기억의 울에 갇혀 살고 있으니, 이쯤이면 내 기억의 검증은 멈춰야 옳은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불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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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비에 보니, 바깥채 차양 물받이 위로 비가 넘친다. 물받이 배수로가 막힌 모양이다. 주말 동안 또 비가 적지 않게 온다니 바깥채 지붕에 엉금엉금 올라가 배수로에 쌓인 낙엽 긁어내고. 씻고, 그제 끓여 놓은 된장국에 저녁 챙겨 먹고나서 담배 먹는 짬에 유튜브에 출근 도장 찍고. 농약사 아저씨가 시킨 대로 발근 촉진제에 한 시간 담갔다가 물기 마르라고 건져 놓았던 손질한 장미 가지, 앵두나무 아래 반그늘에 쿡쿡 눌러 박아 놓고... 발근 유도제 처리까지 해서 심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고, 살면 좋고 아니어도 할 수 없는 일이고.


 장미 가지를 심으며, 장미 가시에 찔려 죽은 릴케를 생각하며 '피식' 썩소를 짓고.

 

 
 202405102617금
 오승근-장미꽃 한 송이

 -by, ⓒ 성봉수 詩人

 

나에게 그대만이-유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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