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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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2007.07.03~2023.12.30)

망각의 힘.

by 바람 그리기 2023.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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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추 한 달 만에 상여 앙장(仰帳) 같은 안방 난방 텐트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기온이 올라 완연한 봄이니 조만간 걷어치워야 할 판인데, 막상 그리하기 전에 왠지 하루쯤 자줘야 할 것 같은 맘이 동했는데 이유는 모른다.
 잡부 나가려고 거실로 나와 불을 켜고 시각을 확인하니 운명하셨다.


 기억엔 이 시계 건전지를 한 번도 간 적이 없으니 적어도 이곳 주인이셨던 아버님 돌아가시고도 여태 그 시간을 잇고 있었다.-건전지 하나의 용량이 그렇게 오래일 리는 없으니 분명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언젠가는 갈았을 듯싶은데, 무언가를 기억 못 하는 내가 오히려 반갑다.
 4월 첫날.
 새 시간을 연다는 게 우연치고는 예사롭지 않다. 사다 놓은 건전지를 확인하니 하필이면 맞는 사이즈만  없다. 사월 첫날 새 시간을 여는 이 예사롭지 않은 우연을 그냥 넘기기 서운해 우선 달력들부터 모두 새달로 넘겨 두었다.

 잡부 현장.
 넓은 수변공원을 끼고 있는 이곳의 벚꽃은 지역의 다른 곳보다 평균 일주일은 늦게 개화하는데, 예년과 다르게 거의 같은 시간에 만개했다. 마침 주말이기도 하고 날도 좋으니 꽃구경 나온 이들이 나고 들고 꼬리를 문다.


 어느 해인가, 남도의 만발한 벚꽃 소식을 보내왔던 사람을 떠올렸다.
 어느 해인가, 사람에 밀려 함께 쓸려 가던 계룡산 벚꽃축제 길의 사람을 생각했다. 그리고 꽃 좋아하시던 어머님을 모시고 이 길을 걷던 누님들과의 몇 해를 생각했다.

 "오늘이 가기 전에 죽은 시간을 살려 놔야 한다"는 찝찝함과 "돌아오는 장에 푸성귀 모종 사서 이식하기 전에 밑거름을 줘 놓아야겠다"라는 생각에,  일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씻고 장 구루마를 끌고 다시 나섰다.
 밑거름 한 포를 사고 돌아오다 다이소에 들러 건전지를 챙기고 식당가를 지나오는데, 맛있는 냄새가 진동하며 허기가 밀려온다.
 그렇다고 혼자 앉아 닭갈비를 먹을 거며 삼겹살을 먹을 거며 아귀찜을 먹을 거며...
 바쁜 시간에 민폐인 되지 않는 우체국 맞은편 중식당에 기어들어 갔다.


 이과두주를 앞서 시키고 면이 물러지기 기다릴 겸 천천히 먹고 있는데, 열어 놓은 문으로 봄바람이 간들간들 불어온다.


그 모습도 그 시간도 뺄 것 보탤 것 없이 어찌나 만족스러운지, 저(箸)를 내려 놓고 한동안 멍하니 내 맡겼다.

 여덟 시도 안 되는 시간.
 누가 드는지 나는지, 대문이 잠겨 있다.

 

 
 20230401토
 Touch_Of_Class-Cry_To_Me
 잡부 마치고 돌아와 부엌문 열고 누더기 벗고 불 켜고 서재 들어와 컴 열고 음악 틀어 놓고, 다시 나가 벗어 놓은 누더기 먼지 터는데 바깥채 문이 열리며 삼월이 언니께서 말씀하신다. "왔슈? 언니랑 통화하느라고..." 돌아서며 생각하니, '들거나 나거나 모른 척하는 것보다 못한, 아니 들은 것보다 못한 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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