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장마는 예년보다 늦어진다지만, 더위가 시작되는 것을 보면 언제 어느 날 쏟아져 내릴지 모를 일이죠.
광에서 삽과 갈퀴를 꺼내고, 조상님께 올릴 식모커피 한 병을 챙겨 헐떡거리는 장화를 끌며 선영에 다녀왔습니다.
산을 오르는 초입.
초록의 그늘에 쌓인 산길이 늘 다니던 길인데도 마치 처녀림에 숨겨진 비밀의 정원에라도 들어서는 듯 생경하게 압도합니다.
잠시 공포감이 들 정도로 말이어요.
산에 올라,
우선 부모님께 식모커피와 담배를 고이며 넙죽 절을 하고 옷부터 훌러덩 벗어 버렸습니다.
다행히도 지난봄에 보식한 떼는 제대로 활착이 되었는데요, 딱 그만큼만 더 보식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도록 아직은 엉성합니다.
윗대 어르신부터 물골에 쌓인 낙엽을 긁어내고 쓸리는 곳 없도록 손보고.
부모님 묘 마당에 장화 벗어던지고 털푸덕 주저앉아 담배 몇 대 먹으며 바람에게 중얼중얼거리는데,
법면 옆 산밤 나무 꽃의 늦은 만개가 콧구멍에 보내는 대답이 장관입니다.
꽃 냄새에 취하고 새소리에 취하고 바람에 부서지는 참나무 잎의 햇살에 넋을 놓고 앉았다가,
땀이 식어갈 무렵 산을 내려왔습니다.
내려오면서 뱀딸기를 시름없이 몇 개 우물거리다가,
벌레 먹은 못생긴 네 잎 클로버를 손에 넣었습니다.
산 아래에 내려와서는 푼수 없는 코스모스와 마주했습니다.
아무리 단일 식물(낮의 길이가 짧아지는 때에 꽃이 피는 식물)이라지만, 오늘이 낮의 길이가 제일 길다는 하지(夏至). 즉, 오늘 이후로는 낮의 길이가 짧아진다는 얘기이니 자연의 섭리 앞에 경외감이 들었습니다.
하지.
24절기 중 열 번째이고 오늘로 낮이 꺾였으니 올해도 그믐으로 저물기 시작했습니다.
참 도둑 같은 시간입니다.
집으로 돌아와 몇 포기 캐 온 코스모스를 심고 삼월이 언니가 말아준 콩국수 한 대야를 돼지처럼 먹으며 뉴스를 보는데, 비예보가 있군요. 오늘 다녀오길 잘한 듯싶습니다.
바람종이 잠잠하지만 서늘한 바람이 슬슬 서재 창을 넘어서는 것을 보면 뭐가 오긴 올 듯합니다.
아직 잠들지 않으신 분은 꿀잠 이루시고,
지금 일어나신 분은 행복한 하루 보내시길 빌어요. 우산 챙기시고요.
돼지처럼 먹은 콩국수가 아직 그득하니 잠도 못 자겠고,
지금부터 뭐라도 꼼지락 거려야겠습니다.
202106212537월하지
함중아-이밤이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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