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짱이 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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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ㅁ안방

베짱이 된 날.

by 바람 그리기 2024.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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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느 날과 같이 술밥상을 차려 앉았고. 냉장고에 삐들거리는 시금치 반 줌과 당근 반토막 남은 것 정리할 겸 돼지괴기를 볶었고.


 여느 날과 같이 술상 발치로 밀어 놓고 피시식 잠들었고. 푸우며 도라에몽이며 어쩌면 빗자루와 고무나무 정령들까지, 구겨 버린 종이처럼 형광등 아래 찌그러진 나를 올라타 밤새 걸리버여행기 놀이를 했을지 알 수 없는 일이고.
 그래서인지, 아구구구 신음을 내며 여느 날과같이 찌부둥둥한 몸을 살살 달래며 꿈도 아니고 생시도 아닌 시간에서 눈을 떴고.
 여느 날과 같이 영등포역 노숙자보다 나을 것 없는 먼지투성이 옷 챙겨 입고 품 팔러 나섰고.
 집에 돌아와 대문을 밀칠 때, 여느 날과 다르게 삼월이가 골목 끝까지 쫓아오며 반겨줬고.
 여느 날과 다르게 일곱 시 조금 넘은 이른 시간에 밥상을 차렸고. 밥상에 승주가 주고 간 더덕주 한 곱부 따라 반주로 올렸고. 잔을 채우며, 이쯤이면 "알콜중독"이라 불릴 자격을 갖췄다고 생각했고. 이를 닦으며 설거지통에 산을 이룬 그릇들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수저통에 쓰지 않은 수저 하나 남아 있는 것 확인했고. 그래서 최후의 하나까지 긁어 쓰기로, 설거지는 하지 않기로 했고. 베트남 겡기랍 커피 한 티스푼을 액상 커피에 보태 짝퉁 에스프레소 만들어 서재로 들어왔고. 창밖에 토닥거리는 빗소리 들으며 깊은 담배 연기 한 모금 필요했고. "시가 마스터" 7,500원짜리 담배를 두 개비나 폈고. 생경하게 귀한 탄수화물이 유입되었으니, 밥통이 적응 못 하고 부대끼고 있고. 여느 날과 같이 오늘도 날밤을 새울지는 지금은 아직 모를 일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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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 시의 잡부 현장.
 공정 확인차 들린 주인 부부의 두런거림이 뒤통수를 긁적거린다.
 "J에서들 오셨습니까?"

 동창 부부.
 C 시로 이사가 자리 잡은 것이 오래전 일이고, J 읍에 살던 아들 부부가 직장 때문에 이곳 c 시에 새로 장만한 집을 리모델링하느라 C 시에서 어젯밤에 와서, 교육청 공로 연수중인 친구 아무개 집에서 과음하고 거기서 자고 오는 중이란다.
 기억을 더듬으니 예비군 훈련 때 본 것이 마지막이었으니 전설의 고향 같은 이야기다.
 '친구, 그 시절이 다 어디로 갔는가?'
 "그려. 세월 참 빨러..."

 담배 먹는 짬. 인도 경계석에 쪼그려 앉아 금방이라도 비가 떨어질 것처럼 잔뜩 웅크린 하늘을 올려보다 생각한다.
 '아들 키워 출가시키고 집 장만해 분가시킨 지 오래라... 내 꼴이 우화 속 베짱이와 다를 것 없구나. 내가 여기 기웃 저기 기웃 갈팡질팡 껍죽거리던 동안에 소규모 직장에 몸담고 착실하게 생활하더니, 그 한 발 한 발 디딘 세월로 나보다 만 보를 앞서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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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은 하늘이 터졌다.
 차창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며 생각한다.
 '베짱이? 내가? 진짜 베짱이처럼 살았다면, 지금 이렇게 찝찝하게 복잡한 마음은 아닐 텐데...'


 202403252536월
 조성모-가시나무
 세금.


-by, ⓒ 성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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