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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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2007.07.03~2023.12.30)

장 그대로.

by 바람 그리기 2023.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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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장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무심코 바라본 멀리 오송의 뜰.
 머지않아 대단위 공단과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게 될 곳. 황사로 혼탁해진 하늘 저 끝 언덕 위 공장에서 뿜어 나오는 연기.
 내 첫 직장으로 잠깐 스쳐왔던 곳.
 지금도 그곳에는 그곳을 최선이라 여기는 누구의 아들딸, 어머니 아버지가  노동의 품을 팔며 신성한 땀을 흘리고 있겠지.

 "이 양반은 왜 기저귀를 차고 다녀?"
 지난번 잡부에서 마주쳤던 영감탱이, 누더기 엉덩이에 기운 누루미를 보고 또 재미들린 추임새를 넣는다.
 



 등골에 땀이 흐르도록 이른 더위가 왔던 날.
 담배 먹는 막간에 바람을 따라 시선이 멈춘 곳, 부서지는 햇살이 은혜롭다.

 대문에서 우편물 한 뭉텅이를 꺼내며 잡부에서 돌아왔다. 고추 모종에 첫 추비를 주고 씻고 들어와  빨아 말려 걷어 던져 놓은 겨울옷을 개기 시작한다. 한 계절 차이라면 그냥 두었다가 도로 입으면 편할 일인데, 봄이 가고 여름 지나고 가을도 보내고야 입을 옷이니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다.
 이놈의 빨래라는 것이 어떤 날은 참 쉽게 개켜지는데, 간혹 어떤 날은 개어 놓은 크기도 통일되지 않고 각도 안 잡히는데 하필이면 그런 날이다. 그렇게 앉아 꼼지락거리는데 슬슬 부아가 치민다. '애이 C! 그냥 쓰레기 봉지에 담아 다 버려버릴까? 아니지! 없으면 나만 손해지!' 알 듯 모를 듯한 이유로 치미는 부아에 갈팡질팡하는 맘으로 겨울옷 정리를 마치니 여덟 시가 훨씬 넘었다. 배는 고픈데 부엌 들어가 덜거덕거리기는 귀찮고, 부아 치민 핑계로 술밥을 먹어야겠다.
 슬리퍼 끌고 식식거리며 마트 가서 25℃ 오리지널 두꺼비를 잡아 와 상을 차려 서재에 앉았다.
 자해의 담배빵 같은 빈속에 넣는 술의 쓰린 통증의 쾌감을 즐겼다.
 그러다 언제인지도 모르게 쓰러져 잠들었다.
 


 그저께의 일이다.

 

 그랬으니, 잡부 나가려 일어나 거울 앞에 서니 해독되지 못한 술의 여파가 확연하다.
 얼굴이 백년초로 반죽한 호빵처럼 벌겋게 부었다.
 반나절 잡부 마치고 순대국밥으로 점심 먹고 돌아오는 길에 토란 모종 세 개를 샀다. 한 해 푸른 잎을 보고자 심는 토란인데, 작년 채종해서 심어 놓은 세 알이 잠깐 볕 드는 오래된 집 마당에 싹을 틔우려면 꼴이 한여름은 되어야 할 듯싶다. 그래서 보험으로 더 심어 놓기로 했다. 조급함이다.

 커다란 택배 박스가 가로막은 대문을 밀치며 집으로 들어서, 토란과 함께 사 온 일년초 모종 하나 심고, 떨어진 바람종을 수리해 원상복구하고 삼월이와 얘기하며 담배 한 대 먹고. 

 그제 고추 모종에 추비 주며 든 생각.
 '이누마! 매형께서 부모님 묘소 뒤편에 심은 영산홍은 5년이 지나도 벌지 못하고 삐들 삐들 장 그대로인데, 니 입에 들어갈 고추 모종만 눈에 보이는구나...'
 얼마전 꿈에 나타나신 부모님에 대한 궁금증.
 '무슨 일이었는지, 백치처럼 환하게 웃으시던 어머님과 그 곁에 계시던 변하지 않은 생시 그대로의 아버님...'
 식목일 무렵 보식한 떼의 활착에 대한 현실적 궁금으로 장비 챙겨 선산으로.

 아니나 다를까!
 어머님 쪽 보식했던 떼도 물론이고 손대지 않은 곳과 법면 한쪽까지 고라니가 지랄해 놨다.



 산짐승 물 먹으러 내려가는 길이 되어 있으니 법면 쪽이야 이해의 여지가 있다고 하지만, 또 이식했던 개나리 일부도 또 헤집어 놨다.
 묘 마당에서 떼 떠서 응급으로 보식하고 흙 퍼다 덮고 두드려 놓았지만, 이놈에 고라니를 어찌해야 할지... 그렇다고 올무를 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삼월이를 끌어다가 묶어 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지난번에 폈던 분홍의 영산홍은 시들 거리지만, 진홍 특히 흰 영산홍의 모습이 백합 부럽지 않을 정도로 장관이다.



 고라니가 파헤친 두 주를 빼고는 나머지 개나리는 잘 활착한 듯싶고,
 흙 퍼 나르느라 힘들었어도 잘 가보기를 잘했다.

 "밥하러 갑시다. 오후 다섯 시 오십오 분입니다"
 알람 소리를 들으며 부모님께 넙죽 절하고 산을 내려서 집에 도착하니 깜깜하게 하루가 다 갔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파 설거지할 생각을 접고, 3분 짜장 데워 드럽게 맛없게 한 끼 뚝딱 먹고 서재 컴 앞에 앉아 3시 반까지 대책 없이 절구질하다가 잠들었다.


어제 일이다.
  

 
 202404221934토
 소리새-꽃이 피는 날에는
 설거지는 해야 하고, 어깨는 빠질 것처럼 아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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