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미로를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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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2007.07.03~2023.12.30)

기억의 미로를 걷다.

by 바람 그리기 2023.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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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섯 시 반.
 모처럼의 자위적 왜곡 없는 날것의 시간, 안과 밖 창이 모두 훤하다.

 나의 일조는 점점 짧아지고 그런 나를 집어삼키는 묵비의 광명은 불식간에, 모가지에 차올라 있다.
 존재와 비존재가 상충하는 이 극명한 명암.
 그 바닥을 더듬적거려 담배를 물고 하루를 연다.


 그렇게 연 하루.
 잡부에서 돌아오는데 아침까지 그대로였던 봉오리 하나가 혼자서 툭, 터져있다.

 '오래된 집 마당에 드는 잠깐의 빛. 그 빛에 간절한 모가지를 길게 빼고 또 한 계절을 살아낸 네게 감사한다.'


 저녁부터 비 예보가 있으니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었으나 그러고 싶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조루를 들고 위아래로 다니며 푸성귀와 화단에 물을 줬다.
 그러고는 샘에 쭈그려 앉아 얼추 일주일 전 선영 산골짜기 발치에서 뜯어 온 쑥을 다듬었다.
 삽으로 대충 푹 떠서 챙긴 쑥. 비닐봉지에 담아 샘 한쪽에 던져두었던 쑥.
 뜬 잎과 뿌리와 엉검불을 골라내니 한 움큼 남짓.
 소금물에 토렴해 슴슴 간간하게 된장국을 맛나게 끓였을 때, 비를 머금은 바람이 마당을 휘돈다.
 빨랫줄에 춤추는 대주님 와이셔츠를 걷어 처마 아래로 옮겨 놓고 서재로 들어왔다.


 졸졸 물을 틀어 놓고 꼼지락꼼지락 쑥을 다듬는데 갑자기 물회가 먹고싶어졌다.
 이 뜬금없는 식욕이 의아하고 당황스럽다.

 "쑥과 물회"
 도대체 내 시간의 어디에서 만나 교집합이 되었을까?

 두 기억이 마주치는 시간의 미로를 거슬러 한참을 헤매다가...

 

 
 202304281740금
 남택상, 사해-여름날의 추억 mix 미소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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