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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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2007.07.03~2023.12.30)

고추전에서

by 바람 그리기 2022.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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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근 도시에서 약속.
 약속 장소가 버스터미널이니 예약하려고 앱을 연다.
 '현장 예매 터미널"
 집을 나서니 볕이 한창인 시간인데도 몸이 움츠러들도록 쌀쌀하다.
 터미널에 도착했는데 차편이 없다.
 코로나 이전에는 있었던 거 같았는데, 말이 공용버스 터미널이지 거의 시내버스 차고지처럼 변해있다.
 철도가 발전한 곳이기는 해도, 내 어릴 적엔 버스 역시 거의 전국각지로 연결되던 곳이었는데 쇠락하는 구도심의 단편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끝에서 끝으로 걸어온 품이 아깝다는 핑계로 삼천포로 빠져 대낮에 회주를 잡고 앉았다.



 한 병이 두 병이 되고 두 병이 세 병이 되었다.
 웅얼거리던 뒤 테이블의 손님들이 나가고 나 혼자 남은 호젓함이 그랬고, 안주가 한 첨 남았다는 것이 그랬다.
 그렇게 술밥을 먹고 나선 인적 끊긴 시장 뒷길, 고추전.



 불야성을 이룬 거리에 한복 입은 색시들이 분내를 풍기며 웃음을 팔던 곳.
 "은희집" "한가정" "학교" "모래시계" "갈채" "사슴꿈" "카오스" "상록수" '밤안개" "사계절" "오렌지" "금잔디"...
 하나둘 사라져가고,
 골방문 걸어 잠그고 장 보러 나온 시골 영감들 쌈짓돈을 털던 늙은 작부는 며칠 만에 주검으로 발견되었고. 마지막 하나 남은 곳도 어느 날 점포 앞에 엠블란스가 다녀간 후 영영 사라졌다.

다음 로드뷰 2010 (안 박사님 청춘을 바친 상록수 ㅋㅋ)


 내가 이 거리 불빛 아래 휘청이며 걷던 게 삼십 년도 훨씬 더 된 이야기이니 세월이 많이 흐르기는 했는데, 그때 이 거리를 헤매던 또 다른 나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 할망구가 되었을 그 색시들은 또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늙은 도시는 "도시 재생"이라는 그럴듯한 그들만의 회칠로 시간의 싹을 덧발라 어정쩡하게 멈춰 서 있고,
 이 도시 이 거리와 함께 어정쩡하게 늙은 나는 어정쩡하게 잊힌 배우와 마주 앉아 딸과 소방관의 손에 문이 뜯긴 골방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이 거리의 마지막 작부 얘기를 나눴다.



 새로 한 시 반에 일어나 바람든 무 하나 우걱우걱 씹어먹고 서재로 들어왔다.
 마감인 원고 보내놓고 떨어진 담배 사러 무인점포로 운영되는 집 앞 편의점에 건너갔는데, "담배와 술"은 팔지 않는다.
 머쓱하게 그냥 한 바퀴 돌고 집으로 와 깔깔이 걸치고 다시 나가 역 앞 편의점까지 다녀왔다.

 돈 떨어지면 쌀 떨어지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처가에서 보내온 쌀이 한 가마 있으니 독거노인 겨울 날 먹거리는 걱정 없는 일인데, 춥다.
 밖이 생각 외로 몹시.
 난 화분들 처마 아래로 들여놓는다는 게, 술밥 먹고 들어오며 대문 넘어서는 순간 까먹고 말았다. 얼음 먹지 않았을지 걱정이다.
 크리스마스트리도 꺼내야겠고...

 

 
 202211270647일
 폴모리-시바의 여왕
 아고 추버랏!
 밤이 길긴 길다.

 -by, ⓒ 詩人 성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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