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병통치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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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2007.07.03~2023.12.30)

만병통치약

by 바람 그리기 2022. 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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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풍이 오기 전에 바람 좋으니 빨래해야겠습니다.
 속옷 두어 벌과 양말을 빠는 김에 날 추워지면 입고 나갈 작업복도 함께 빨았습니다.
 작업복을 빨며 갑자기 생각이 났습니다. 혼자 키득대던 웃음 끝에 오야의 진심과 의도가 궁금해졌습니다.
 명색이 직영 잡부라고 직원 복지 차원에서 날 추워졌던 언제, 상의 점퍼를 주문해주었는데요... 꼭 이랬습니다.


 자기는 몸에 꼭 맞는 걸 입었으면서, 저는 105를 주문했다는데 그랬습니다.
 장만해준 성의가 괘씸해 아랑곳하지 않고 소매를 둘둘 말아 며칠 입고 나섰는데요, 삼용이 같은 이 모습을 보면서도 오야는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단가를 물어보니 35,000환이랍니다. 장에 가면 넉넉하게 20,000환이면 흥정 없이도 살 제품인데 너무 비싸게 주고 샀습니다. 그러니 그냥 그대로 입기엔 돈이 아깝습니다.
 "오야님, 이거 비싸게 주고 산 건데 라벨도 떼지 않았으니 교환하시죠?"
 도착한 지 오래되었다며 다시 주문해 준다고, 새로 맞는 옷을 주문해 줬습니다.
 입었던 옷을 오야께 반납하느라 포장하며 확인하니, XXL이더군요. 송탄 미군 부대 앞에나 가야 살 수 있는 크기의 옷을 주문해 입히고 아무 말 않던 오야의 맘을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빨래 널러 옥상 올라가는 김에 소쿠리를 챙겼습니다.
 남은 고추를 모두 따고 나무를 뽑아 정리할 생각이었는데요, 막상 성한 푸른 잎과 다닥다닥 달린 청양고추를 보니 차마 그럴 수 없었어요. 심어만 놨지 거름 구경 못한 나무가 햇빛 며칠 더 쐰다고 얼마나 더 여물겠습니까만, 이번 태풍 지나간 후에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옥상에서 내려와 눈에 보인 김에,
 잘 길러 뽑아 씻고 말려 놓은 만병통치약을 뒷마무를 하기로 했습니다.
 어떤 이는 호적에 글씨로만 있는 얼굴 잊은 냄편인데도 매 가을 보약 한 재씩은 꼭 해줬다는데, 이 몸은 군대 가기 전 어머님이 챙겨 주신 것이 마지막이었으니 이제 약발 잘 받을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쭈그렁밤송이가 되어가는 형편인데, 요 며칠 조석으로 기온이 내려갔다고 벌써 전기 매트에 불 넣고 지내는 꼴이 올겨울 날 일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 약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두통, 치통, 복통, 월경통, 염병, 뗌병, 가슴앓이, 어지럼증, 토사곽란, 속병은 물론이고 습진, 두드러기, 무좀, 기침 가래 천식, 밥 안 먹어 푸석푸석 버짐 피는 애, 오줌 싸는 애, 특히 온갖 암의 치료에 탁월한 효능을 보이는 만병통치의 비기'인데, 잉카제국의 후손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비법이라서 어느 암 환자가 이걸 구하러 뱡기 타고 가서 보니 우리 주변에 흔히 보는 잡초라서 깜짝 놀라고 돌아왔다"라고, 인터넷 카페가 한창 활성화되던 때에 많이 포스팅되었던 그 풀입니다.
 돌아가신 큰 누님 위중하실 때, 보물찾기하듯 눈에 쌍라이트 켜고 돌아다니며 뽑아 말려 소포로 보낸, 어느 구석에 쑤셔박혔다가 그냥 버려졌을 그 비기의 약입니다.


 바싹 마른 풀을 가위로 잘게 잘라 약한 불에 덖었습니다.
 이미 명태처럼 바싹 말랐으니 덖을 필요가 없기는 했는데요, 이왕 먹는 거 "구증구포(九蒸九曝)"의 심정으로 계피 몇 토막을 더해 덖었습니다.
 사실, 처음 뽑아 말릴 때의 생각은 그냥 차로 우려먹을 생각이었는데요, 잡부 나가서 주워 온 썩은 꿀을 계제에 함께 처리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풀을 덖는 동안, 썩은 꿀을 뜨거운 물에 먼저 담가뒀습니다.


 작년 겨울에 사다 먹고 봄에 마늘종 장아찌 담가 담아뒀던 유자차 병을 비우고 끓는 물에 소독하고,


 덖은 풀을 식혀 썩은 꿀에 잘 버무려 마무리했습니다.


 주걱에 붙은 것을 뜨거운 물에 녹여 일단 시음했는데요,


 아직 꿀이 배지 않고 숙성도 되지 않아서이겠지만, 국물은 외양간에 쇠죽 냄새가 나고요 건디기는 칡뿌리 씹는 것처럼 질겅거려서 뱉어냈습니다.
 100% 꿀인데 왜 전혀 단맛이 느껴지지 않죠? 진짜 꿀이 썩은 건가요? 상상하지 못한 맛을 경험했습니다만, 일단 며칠 실온에 숙성시킨 후에 다시 먹어봐야겠습니다. 정 못 먹겠으면 삼월이에게 까까 대신 한 수저씩 퍼먹이죠 뭐.

 두 시쯤 되었을 겁니다.
 저녁상 밀쳐 놓고 "백분토론"보다 잠들었다 깬 것이요.
 그런데 어딘지 몸이 또 불편합니다.
 배가 아픈 듯도 싶고...
 일단 건너채 화장실로 건너가 비몽사몽 쭈그려 앉았는데요, 갑자기 식은땀이 옷이 다 젖을 정도로 등골을 타고 흘러내리며 구역질이 납니다. 두통과 함께 머리도 핑핑 도는 혼미한 상태로 식은땀만 쏟아내다 건너왔습니다. 건너오기 전 거울을 보니, 얼굴이 미남 배우처럼 창백합니다.
 "염병, 체했구나..."
 우선 생각나는 게 그랬습니다.
 라면 삶기도 귀찮고, 삼월이 언니께서 적선하신 인절미 한 팩으로 저녁을 때우기로 했는데요, 먹고 남은 콩고물이 아까워 스티로폼 포장기 그대로 밥 한술 덜어 고물에 굴려 먹었더니 그렇지 싶습니다.

 오래전 누님께서 챙겨주신 약에 정로환을 더해 먹고 상황을 살피는데요,


 얼마간 지났어도 구역질이 자꾸 나고 머리가 핑핑 돌며 아픈 것이 아무래도 따는 것이 현명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돌아가지도 않는 팔을 반대 손으로 팔꿈치를 밀어 올려 등 두드리고 훑어내려 실로 묶고 따면서 생각했습니다.
 '영등포역 노숙인도 너처럼 원맨쇼는 안 하것닷 ㅋㅋㅋ'

 그나저나, 이게 정말 체한 건지, 꿀이 썩어서 배탈이 난 건지, 만병통치약 약효가 너무 좋아 단박에 명현현상이 나타난 건지 판단하기가 모호하군요.

 정확하게 6시 지나며 한차례 쏟아지던 비가 지금은 뜸한데요, 모두가 태풍 피해 없이 잘 지나가면 좋겠어요.

 

 
 202209040640일
 梶 芽衣子_MEIKO_KAJI-怨み節 (1973)_URAMI_BUSHI

-by, ⓒ 詩人 성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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