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무렵 잡혔던 약속. 아니지 정확하게는 시간과 장소 정해 연락 달라 했으나, 점심 무렵이거나 그 언저리 시간에 잡히리라 생각하고 있던 약속. 그러니 기별 오기 전에 할 일들 마무리 해놓느라 오전 내내 바쁘게 서둘렀던.
그렇게 마무리해 놓고 이제나저제나 기다려도 감감무소식. 밖으로 나서지도 않고 다른 일 벌이지도 않고 저녁이 다 되도록 기다려도 종무소식.
'뭐 하자는 겨?'
저녁상 차려 앉은 7시 반쯤 울리는 전화벨.
"...그리하여 내일 만나자"는.
참 싱겁고 매칼 없다.
컴에서 메일 주고받으며 할 일들은 오전에 다 했고, 저녁 먹은 설거지부터 고조부님 기제사 모신 설거지도 다 해치웠으니 딱히 할 일이 없는데 마침 졸리다. 잘 되었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내는 심정으로 잠이나 자자.
컴을 끄고 서재 불도 끄고 거실(겨울옷 빨아 쌓아두었던 것들, 고조부님 제사 모시느라 안방 난방텐트 안에 다 쑤셔 박아 놓았으니)에 자리 펴고 불도 끄고 반듯하게 누웠다.
얼마나 지났을까?
몸에 벌거지 기어다닐 조짐이 슬슬 보이기 시작하며 영 불편하다. 뒤척이다가 벌떡 일어나 앉았는데 졸리다. 졸린데 불편해 죽겠다. 어디가 불편한지 모르겠는데 불편하다.
담배를 찾아 물며 시각을 확인하니 막 날이 바뀌었다.
'뭐여? 이제 자정이면 도대체 얼마를 잤다는 겨? 몇 시부터 잤지? 10시는 지나서인 거 같은데... 그럼 그렇지, 내가 이 시간에 잠은 무슨...'
어쨌건 불편해 죽겠다.
잔 것도 아니고 안 잔 것도 아니고 깬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몽중도 아니고...
담배가 있으니 이 한밤에 딱히 바깥 출입할 이유가 없지만, 정체불명의 불편함이 마치 하멜른의 동화 피리 부는 사나이 속 아이들처럼 혹은 홍콩 영화 속 주술사를 따라 겅중겅중 뛰어가는 강시처럼 나도 모르게 인적 끊긴 밤거리를 걷고 있다.
편의점에 들러 캔맥주 한 병과 핫바 하나를 챙겨 텅 빈 역 광장 한쪽에 달빛을 벗 삼아 앉았다.
손님을 기다리는 두 대뿐인 택시를 제외하면, 철시한 상점과 셔터가 내려진 역사와 노숙인도 자취 없는 적막.
"아, 고립무원의 섬이 따로 없구나!"
시내 가로를 한 바퀴 돌며 돌아오는 길.
그나마 걸렸던 연등도 사라진 적막한 거리의 늙은 도심의 풍경이 애련하다.
'내가 태어난 이 거리는 날로 쑥쑥 발전하며 청춘의 괘와 함께했는데, 이젠 나처럼 늙어가니... 내 지난 시간을 발가벗긴 반면교사가 따로 없구나...'
202405220158수
NINI_ROSSO-WONDERLAND_BY_NIGHT
-by, ⓒ 성봉수 詩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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