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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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2007.07.03~2023.12.30)

유난스럽다.

by 바람 그리기 2021.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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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 (사람이나 그 언행이) 보통과 다른 면이 있다.

 바닥에 닿는 쇠 다리의 한쪽 면이 녹슬어 허물어져 기울어졌고, 쿠션은 개새끼들이 올라가 박박 긁어 구멍을 내놨고 등받이와 팔걸이도 삭아 헤진 것을 박스테이프로 둘둘 말아 놓은.
 지금은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낡고 쓸데없는 의자를 재활용 수거 일에 맞춰 딱지를 붙여 내놓은 것뿐인데.
 대신할 의자도 진작에 마련해 놓았으니 그뿐인데.

 

 뒤돌아서는 마음이 영 서운하다.
 길 건너 편의점에 들러 족발과 빨간 이슬이와 pet 병에 담긴 맥주('해당 용기 사용금지'라는 보도를 본 것이 오래라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아직도 나오고 있다)를 사 들고 왔다.

 

 참 유난스러운 일이다.


 어느 해인가,
 그때는 현관 앞에 놓였던 이 의자에 아버님이 앉아 출근하는 나를 지켜보셨는데, '모든 것을 비운 무념무상의 표정'을 처음 뵈었다.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이 완벽하고 냉정하고 어렵기만 했던 그때까지의 아버님이 아니라 그저 늙어 힘없는 한 노인이, 골목 끝부터 길게 번져오는 아침 햇살을 은빛 머리칼 위로 유난히도 반짝이며 앉아계셨다.
 '무슨 하실 말씀 있으세요?'
 "없어. 없어! 출근하거라"
 돌아가시던 해인지 그 전해였던 거 같은데, 그때의 아버지 모습을 뵈고 대문을 밀치고 나서면서 읊조렸던 '부모님 모시고 가족사진을 찍어야지'
 그때 든 '가족사진'에 대한 생각이, 이별에 대한 예감이나 선천적으로 타고난 직감이었던 듯싶은데 그렇게 서둘러 떠나시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으니 결국 부모님을 함께 모신 가족사진을 남기지 못했다.
 의자만 보면 문득문득 떠오르던 그때의 그 평안하던 아버님 표정.
 무언가 하실 말씀이 있는 것 같았던...
 그 낡은, 아버님의 의자를 내놓으며 자꾸만 그 표정이 떠올랐다.

 아버님이 떠나시고 몇 해 후 지병이셨던 당뇨의 끝, '신장 투석'에 이르신 어머니.
 처마 끝, 서쪽을 향해 옮겨 놓은 그 의자에 나란히 앉아 어머님 노래도 들었고 이런저런 담소도 나눴고 볕이 좋은 날엔 억지로 모시고 나가 일광욕을 시켜 드렸던.

 

일광욕하는 노파 3.

아침을 먹고 치우고 어제 사 들고 온 열무와 얼갈이배추를 어머니께 다듬으시라 하고 찹쌀풀을 쑤어 식히고 김치 물을 만들어 미리 익히려 2층 볕 잘 드는 곳에 올려놓고, 간 김에 독 뚜껑 열어

blog.daum.net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이 몸이 달며 날마다 최선이었던.


 밤을 꼬박 새운 내가 첫 커피를 들고 앉아 새소리를 듣던...
 그 의자를 내어놓았다.
 아니, 버렸다.
 대신할 의자를 진작에 마련해 놓고도 손 놓고 있었던.


흘러가는 물이 단 한 순간도 같은 물이 아닌 것을 잘 알면서도 내가 흘러가는 오늘은 참 유난스럽다.


 

 


202104221432목
민우혁-아버지의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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